[아카쿠로] 내담자의 불공정

HQ

2016. 5. 24. 11:00

리시브 하는 쿠로오, 손가락 너무 예뻐. 원래 그렇게 길었나?





"어이, 아까부터 왜... 아. 그만, 좀."

아프다니까. 오늘따라 손가락에 집착하는 이유가 뭐야? 눅눅한 시트에 휘감겨 눈물이 말라붙은 애인의 얼굴에 힘들어 죽겠는데 귀찮게 군다는 불만이 떠올랐다. 쿠로오 테츠로와 아카아시 케이지. 둘의 밤은 늘 그렇듯 뜨거워서 시끄러운 정적이었다. 아카아시는 몇분 째 쿠로오의 마디 진 손을 붙들고 이를 세워 한참을 물고 빨며 놓아줄 줄을 모르고 있었다. 그의 선이 고우면서도 날카롭게 단정한 얼굴은 이럴 때 옅은 빛에 색정적으로 드러나곤 한다. 아카아시 케이지의 내리 깐 눈에 쿠로오는 이미 붉어진 얼굴에 또 열이 오르는 것을 느꼈다. 저 얼굴을 하고 남의 위에 올라타서─지금도─ 단호하게 휘둘러대는 것을 좋아한다는 것만 빼면 참 예쁜 얼굴인 게 분명했다. 긴 속눈썹에 이어진 그림자를 얼굴에 드리우고, 붉은 혀를 내밀어 제 손끝을 핥는다. 흰 이를 드러내 잘근잘근 물면서 집요하게 못살게 굴자 손끝에는 무수한 잇자국이 남았다.

야살스럽게 올라가는 붉은 입꼬리가 뇌리에 박혔다. 그냥요. 다시 머리채를 잡아채고 찍어누르며 그의 위에 군림하는 폭군이 지었다고는 믿을 수 없는 예쁘고, 나쁜 미소였다.






아카아시.
제 에이스는 자신을 그렇게 부르곤 했다.

토스를 부를 때, 스파이크를 멋지게 넣고 칭찬을 바랄 때, 부탁할 게 있을 때, 장난을 칠 때, 실수를 했을 때. 혹은 아주 그냥의 이유로. 아카아시 케이지는 하루에 몇십번씩 듣는 같은 목소리의 제 이름에 아주 익숙해져 있었고 오늘의 '아카아시'는 고민이 있어서 부르는 아카아시였다. 울듯한 표정으로 터덜터덜 걸어와 징징대듯 붙들고 늘어지는 보쿠토 코타로는 연습시합 중에도 통 집중을 못해 결국 네코마에게 세트를 내어 준 후였다. 네트 너머의 기고만장한 고양이는 너무 원색적이라, 대답이 별로 친절할 수는 없었다.

"또 뭡니까."

"아카아시, 아무래도 나..."

"좋아하는 것 같아."





아카아시 케이지만큼 철저함과 어울리는 남자는 또 없을 것이었다. 깔끔한 일처리 능력은 이미 보쿠토의 옆자리에 있다는 것에서 부각될 수 밖에 없었고, 빠르고 단호하기로 정평이 나 있었다. 그런 아카아시의 간결함이 부각되지 않는 것은 쿠로오의 옆이었다.


"가끔 다들 알면서 모르는 척 해주는 것 같다고."

"아무도 모릅니다."

"그러니까 그게 제일. 아무도 모른다는 게 제일 놀라워."


쿠로오와 아카아시가 마주치는 것은 코트 위, 네트를 사이에 두었을 때 뿐만이 아니다. 엄밀히 말하면 합숙때나 연습경기를 하면 마주할 수 있는 코트 위가 아니라 침대 위가 더 잦은 만남의 장소가 되어주곤 했다. 침대에서 만큼은 진하게 붙어 있기를 좋아하는 여느 연인처럼 둘은 꼬박 일년 전 부터 연애선상에 놓여져 있었다. 아니 어쩌면 여느 연인들보다도 독하고 짙은 걸지도 몰랐다. 쿠로오가 그렇게 붙어먹는데 아무도 모르는 게 이상하다는 말을 달고 살 정도로 아카아시 케이지는 금욕적인 얼굴과는 다른 면모가 가득 숨겨진 사람이었다. 데이트 빈도는 아주 잦았고, 섹스 빈도는 그에 버금이 간다. 오며가며 마주칠 지인들을 아카아시는 깔끔하게 피해내는 방법을 알았고, 고등학생의 신분으로 해서는 안될 진도까지 속단으로 찍으면서도 눈 하나를 깜짝하지 않았다. 아마 그래서였겠지.



나, 좋아하는 것 같아.

쿠로오 테츠로를.

─네 애인을─



밤마다 그 쿠로오 테츠로의 목덜미에 원없이 이를 박고, 허벅지를 움켜쥐어 손자국을 새길 수 있는 단 한명이 나라는 걸 알았다면 그런 말을 하지 못했겠죠. 아카아시는 스스로 비밀 연애의 원칙을 얼마나 완벽하게 이행했는지를 누구보다 잘 자각하고 있었고, 웬만큼 허술했어도 이 사람은 가장 나중에서야 말해주어 알았을 눈치의 소유자라는 것도 누구보다 잘 알았다. 보쿠토 코타로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결국 도피처, 상담처, 결국 모든 것은 아카아시 케이지에게로. 너무나도 당연시 되어져 오던 공식이다. 실제로 후쿠로다니 학원에서 보쿠토와 아카아시는 어떻게 떼어놨다간 하늘이 두쪽나는 한쌍이었다.



그래도,
짜증나는 건 어쩔 수 없는 겁니다.



아카아시와 쿠로오가 처음으로 침대 위에서 뒹굴었던 날은 비가 오던 날이었다. 그 날, 별 연이 없던 연습상대 팀의 세터에게 전화가 온 이유는 기억이 나지 않지만 아직도 기억나는 건 결국 섹스와 연애의 상대가 하루만에 결정나던 경위다.

그의 한정된 친절함은 보쿠토라서 가장 너그러웠고, 보쿠토라서 가장 각박했다.

그 날은 비가 많이 왔었다. 우산도 뭣도 없었고, 아카아시가 비를 피할 곳으로 제시한 게 모텔이었다. 오야, 좀 위험하지 않아? 그때까지만해도 웃으며 던지던 말들은 전부 농담이었다. 콘돔이 널리고 당장 서랍 하나만 열어보아도 별 성인용품들이 쏟아져 나오는 모텔에 단 둘이 들어가면서 충분한 상식이 있었음에도 경계라는 걸 하지 않는다. 솔직히 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고, '위험하다'며 말로만 히히덕거리던 걸 온몸으로 체감해 버리고도 그 생각은 여전했다. 내가 아닌 누구라도 그 상황에서 면식 적은, 모범적인 남학생에서 벗어나지 않는 상대 배구팀 세터에게 뒤를 따일 예상같은 거 할 리 없는 것이다. 물론 그 일은 실제로 일어났고, 비를 피할 땐 언제고 헤어질 때 태연하게 가방에서 꺼내주던 우산에 코가 꿰였으며, 그 상황이 일년 째 이어지고 있다.

그때부터 아카아시는 한결같이 간결하고도 날카로웠다. 보쿠토에게는 한정적으로 부드럽다 하나 딱 거기까지인 것이다. 누구보다 그걸 잘 아는 것이 쿠로오였고, 예외라는 걸 두지 않았기에 더 그랬다. 배려와, 예의, 매너에 능숙했지만 기본적으로 친절하지 않다. 데이트를 해도 딱히 다정한 편이 아닌데, 침대 위에서는 그게 심했다. 얄짤 없는 성격인 것이다. 한살 터울은 어디로 씹어먹은 건지 최고로 단정한 얼굴로 선배의 검은 머리칼을 휘어잡는 걸 좋아했다. 쿠로오를 보는 아카아시는 눈을 번뜩이며 낚아채는 수리와 닮아서, 그는 보통의 경우 자신이 어쩌다 이 맹금류에게 귀속당했는지를 이해하고 있었지만 종종 '내가 왜' 로 시작하는 현타에 사로잡히곤 한다. 특히, 이렇게 이유없는 심술에 옭아매어질 때 가장.




리시브 하는 쿠로오, 손가락 너무 예뻐. 원래 그렇게 길었나?



그 한마디에 쿠로오의 손끝에 멍이 남았다. 새겨지지도 않을 것 같은 데에 잘도 찍어놨다며 쿠로오는 그 날 손가락에 테이프를 감아야했다. 세터도 아닌데 진짜, 너무한 것 아니냐고. 일단 애인이고, 선배인데. 아카아시는 조금의 존중이라도 보이는 법이 없었다. 특히 어제부터는 어딘가 이상하게 조금만 틀어도 따갑게 꽂히는 소유욕의 수마가 쿠로오를 숨도 쉬지 못하게 옭아매는 것이다. 꼬박 하루가 지나자 더 짙게 붉어지는 멍자국에 쿠로오 테츠로는 지금 환장할 노릇이었다.

아카아시는 그런 쿠로오의 손을 보고도 아무말이 없었다. 점처럼 남은 검붉은 자국이 스스로의 이가 꽉 물었던 그 흔적이라는 걸 모를리가 없는데도 그랬다. 쿠로오는 뾰족한 송곳니가 손끝부터 천천히 모두 집어삼켜, 포식의 대상이 된 듯한 기분에 전율하던 전날 밤 기억에 미처 다 하지 못했던 불평들을 우르르 쏟아낸다. 공부를 할 때도 테이프를 감을 수는 없잖아. 안그래도 오늘 켄마가, 나른하면서도 명백히 불만섞인 어조가 어제도 함께였던 방 안에 깔린다. 늘 같은 분위기의 편하면서도 아슬아슬한 분위기. 켄마의 이름이 살짝 부르튼 입술새를 비집자마자 잠시 얼어붙다가 눈치빠른 고양이가 입을 다물자 또 금세 녹았다. 진짜, 피곤한 새끼. 아카아시는 그런 쿠로오의 교복 깃을 풀어헤쳐 벌려놓으며 멱살을 잡아 당긴다. 그리고, 순순히 끌려오는 저 만의 피식자의 목덜미를 물었다.

"무슨 일 있어?"

"전혀요."

"내 손가락은 무슨 일이 있다는데."

그렇습니까. 목 위에서 웅얼거리는 무미건조한 대답에 쿠로오가 기어이 이를 드러내며 불평한다. 어딜 봐도, 누가 봐도. 아니, 실은 쿠로오가 아니라면 모르겠지만. 아무튼 어떻게 봐도 무슨 일이 있는 게 확실한데 굳이 아니라는 이유가 뭔데. '아카아시는 원래 그렇다'가 모범답안이라는 걸 알지만 쿠로오는 분통을 터뜨렸다. 이번엔 좀 심한 것 같으니까 불만이 있으면 말로 얘기해. 안그래도 어제부터 이어지던 사소하고도 집요한 심술은 하루종일, 현재진행형으로 가엾은 쿠로오를 물고 늘어져오던 차였고 덕분에 온몸이 말짱하진 않다. 배구를 하는 사람이 아니었다면 진작에 앓아누웠을텐데. 다른 의견이 있는 듯한 아카아시는 그냥 앓아눕길 바라는 듯 굴고 있었지만 쿠로오는 그럴 생각이 없었다.


무슨 일이 없다면 거짓말이기 때문에, 거짓말을 할 생각이 없는 아카아시의 이빨이 다시 쿠로오의 목덜미를 물었다. 이를 깊게 박아넣고, 얕게 물고 씹고. 사실 굉장히 짜증나죠. 내 건데. 보쿠토 코타로의 울상을 지은 얼굴이 다시 떠올라 미간을 찌푸린다. 보쿠토가 밉다기 보다는, 그냥 스스로의 소유욕이 넘쳐 흐르다가 곧 터져버릴 예정이라는 게 느껴져서, 아카아시는 오늘 단정히 깎인 손톱 중 세개를 물어뜯었다.

쿠로오를 좋아하는 것 같아.

그에게 짝사랑의 상대가 생긴다면 결국 연애상담의 대상은 쿠로오나 아카아시 둘 중 하나다. 그리고 둘 중 하나가 상담이 아닌 사랑의 상대가 되어버린 이 경우, 선택지는 한개밖에 남지 않는다. 내담자는 상대의 연인에게 품은 열병의 크기를 그의 앞에서 아낌없이 토해냈고, 아카아시는 그걸 모두 들어준다. 이 이상한 상담의 구도에서, 절대적으로 불리한 건 보쿠토, 절대적 우위를 가졌지만 가장 불쾌한 것이 아카아시. 그리고 절대적으로 손해보는 쪽이 쿠로오.


아카아시의 입술이 목덜미에서 살짝 미끄러져 아래로 내려간다. 옅은 한숨을 내쉬는 쿠로오는 이미 뒷목에 붙일 파스가 있는 거실 두번째 서랍을 떠올리는 중이었다. 모범답안, '아카아시는 원래 그렇다'. 한참 전부터 대여섯개의 순흔을 새긴듯한 그의 집요함을 보아 대답을 듣기는 힘든 듯 했다. 그래도, 뭔진 몰라도 좀 많이 힘든데. 쿠로오는 굶주린 수리의 허리를 감고 좀 더 편하게 고개를 틀었다. 어쩌면 너무 철저해서 오히려 경우가 없는 그를 가장 잘 받아낼 수 있는 게 쿠로오인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 일단 몸을 낮출 것.





정복자, 아카아시 케이지는 쿠로오의 목덜미에 입술을 묻고 만족스레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옳지, 내가 당신을 이래서 사랑해요. 어제도, 오늘도. 어쩌면 내일도. 그의 심술은 쉽게 가라앉을 예정은 아니었다. 목안에서 가늘게 울리는 쿠로오의 신음성에 그는 오늘도 깊은 충족감을 느꼈다. 곧 터져버릴 거라며 울리는 소유욕의 경고가 붉게 번지고, 마지막 순간 아카아시는 그것도 나쁘지 않겠다고 여겼다.

땀에 젖은 목덜미가 섹시해 보이면 나 어떡하지, 아카아시. 나 어떡해?

어떡하긴요. 제가 가려드리겠습니다. 아카아시의 머릿속에도 꼭 똑같은 거실 두번째 서랍이 떠올라 있었다.

'HQ' 카테고리의 다른 글

[오이이와] 개화  (0) 2016.05.27
[리에쿠로] 이율배반적 로맨스  (0) 2016.05.25
[보쿠로] 거짓말 대신  (0) 2016.05.23
[마츠쿠로] 각인  (0) 2016.05.21
[보쿠로] 습관의 양각, 소유의 음각  (0) 2016.05.20
myosk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