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에쿠로] 이율배반적 로맨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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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 5. 25. 18:37

​이율배반적 로맨스 上





…, 저어.


어리숙한 남자였다. 말을 붙이려 눈치를 살피고 있다는 게 그렇게 티가 날 수가 없을 정도로 서툴었다. 우물쭈물, 망설이며 답답하기까지 할 정도로 구는 그는 쿠로오보다도 큰 키를 가졌고,


커피 마시러 갈래여?


또 어이 없을만큼 뜬금없는 사람이었다.





장장 한나절을 쉴 틈 없이 켜진 채인 모니터가 뿜는 청백색 빛에 눈이 피로하다. 쿠로오는 지금 이 순간 잘 피우지도 않는 담배 한 대가 절실했다. 바람이라도 쐬며 목이 화끈하게 독한 연기라도 있으면 정신이 좀 들 것 같아 시계를 힐끔 곁눈질한다. 워낙 바빠 꿈도 꾸지 못할 휴식이 자꾸만 머릿속에 아른거려 워드에 무슨 말을 쓰는 중인지조차 자꾸 도중에 잊고 있었다. 방금 시계 봤는데, 몇시였지? 바빠도 너무 바쁜 것 아니냐고. 얼마나 눈코 뜰 새가 없으면 방금 확인한 시간도 잊는 거냐며 쿠로오가 피곤한 눈 사이를 꾹꾹 눌렀다. 커피, 다 마셨네.

야근은 어제도 했고, 그 전날도 했다. 심지어 오늘은 반시간이나 일찍 출근했는데도 회사는 여전히 분주했다. 중요한 거래가 코앞인 탓에 팀원들부터 쿠로오의 눈밑에는 검은 그림자가 진득히도 붙어 매달리는 중이었다. 이렇게 바쁜데 뭘 더 하라는 거야. 피곤에 절어 워드에 쳐 넣은 헛소리가 없는지 보고서를 검토하던 쿠로오가 쉼 없이 울리는 전화벨과 회사 메시지에 연필 끝을 씹다 말고 짜증섞인 탄식을 뱉었다.


[ 본부장님 부임에 대하여 ]


중요한 것 몇개만 열린 채 방치된 메일함 가장 꼭대기에 새 메일이 쌓였다. 본부장? 유난히 시끄럽던 인사쪽 일이 이거였구나. 별 관심은 두지 않는 건지 쿠로오는 수신 메일함을 지나쳐 작성창을 띄웠다. 통계치가 기록된 워드와 보고서에는 다행히도 헛소리는 써져 있지 않았다. 메일쓰기, 제목은 보고서 최종. 쿠로오는 파일을 죽 끌어다 놓더니 전송하기를 누르고 망설임없이 메일을 종료했다. 다 마신 커피나 채워놓을 심산이다. 시계를 보고, 시간을 확인하고, 워드에 평균치를 넣고. 방금 본 시간도 잊었다는 걸 깨달을 틈도 없이 한번 더 보고, 또 워드를 훑고, 또 방금 본 시간을 잊고. 쿠로오는 최소 일곱번은 곁눈질했던 시계에는 문제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결국 한번도 시간을 알지 못했다는 걸 자각했다. 아, 사람 사는 게 아니네. 다 마신 커피잔에는 얼음이 녹은 말간 물만 고여있었다. 오늘 야근을 할 확률 99%. 커피를 다시 사 올 필요성이 있었다.

쿠로오는 주변 카페를 향하는 길에서야 결국 지금이 점심시간이라는 걸 알았다. 어쩐지 조금 더 소란스럽더라. 늦게 알아서인지 빠듯한 시간에 쿠로오는 결국 카페 옆 샌드위치 가게 문을 열었다. 밥은 먹고 해야하는 거 아니냐고.



연이 닿는 것의 시작은 아주 사소하고, 조금 가벼워도 된다. 샌드위치 가게의 유리문을 밀어 열 때의 그 정도 무게감이면 충분한 것이다. 아마 모든 것은 샌드위치 빵 사이에 계란과 감자 샐러드를 넣을지, 혹은 햄 몇장을 말아 넣을지 고민하는 그 순간부터 시작했다.



시선은 신경쓰이다 못해 무례했다. 너무 직접적으로 느껴지는 것에 아무 생각없이 고개를 돌렸다가 눈이 마주쳐버린 순간까지, 놀랍도록 직관적이고 동시에 강렬했다. 뜬금없이 초면인 남자의 열렬한 시선에 놀란 쿠로오는 햄 샌드위치를 주문할 생각이었으나, 이미 저도 모르게 계란과 감자샐러드로 해달라는 말이 잔뜩 뭉개져 어물어물 뱉어버린 후였다. 바쁜 직장인 단골손님으로서 눈도장을 참 많이도 찍었던 여종업원의 표정이 이상하게 일그러진 걸로 보아 꽤 바보같았나 보다. 아니, 내가 왜그랬지. 침착하게 한번 더 주문을─감자샐러드로, 어쩔 수 없이─되짚어주며 쿠로오는 시선에게서 고개를 돌렸다. 먼저 와 카운터 앞에 서있던 남자가 그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아주, 대놓고. 주문을 재차 불러주느라 고개를 돌렸지만 처음 의식했던 그 순간부터, 눈이 마주쳤을 때, 그리고 지금까지. 고스란히 옆얼굴로 꽂히는 시선은 의도가 불분명했다. 주문을 헷갈려 흐려버릴 정도로 번뜩이는 녹안이 꿰뚫듯 빤히 자신을 바라보고 있음에 쿠로오는 잠시 그가 뱀을 닮았다고 생각했다. 남을 몰래 훔쳐보다가 그 당사자와 눈이 마주쳤음에도 깜짝하지 않고 그대로 되돌려주는 당당함에 되려 눈을 피한 게 쿠로오 쪽이라는 사실은 프라이드가 높은 그에게 꽤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다. 근데 어쩌지, 이미 한번 고개를 돌린 터라 아직도 이쪽을 바라보는 그를 다시 마주 봐주기가 애매한 상황이 되어버렸다. 눈이 마주쳤지만 고개를 돌리지 않은 전적은 이미 있지만 보통은 그러지 않는다. 사람이 이런 상황에서 눈을 마주하다 보면 결국 고개를 돌리는 게 보통인데, 불편함을 견디다 못해 막연한 기대를 품는 것이다. 그만 봐. 사소한 것 하나하나를 재는 동안에도 뺨이 따가울 정도로 무례한 이 남자는 대체 정체가 뭔지 알 수 없었다.

쿠로오는 바쁜 사람이었고, 그의 회사는 바쁜 회사였으며, 지금은 또 가장 바쁜 시기였다… 맙소사. 까칠하게 튼 입술과 어둡게 가라앉은 눈매에서 피곤이 절어 뚝뚝 흐른다. 바쁠만큼 괜찮은 직원인 그는 비즈니스적 부분에서 한없이 '친절한' 사람이었지만 실은 딱히 그렇지도 않았다. 순한 인상은 아닌 얼굴값을 하는 것이다. 길어지는 업무시간은 고객과 상사를 제외한 나머지들에게 여유를 빼앗는다. 쿠로오는 결국 제게서 눈을 돌려줄 기미가 없어보이는 이름 모를 남자에게 곱지 못한 소리를 쏘아 붙였다.─고울 이유가 없었다.

"뭐 묻었습니까?"

그 동안 멍하니 넋이 빠져 바라보았던 것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직관적이었는데. 남자는 마치 자신이 누구를 보고 있었다는 사실 자체를 모른다는 것처럼 화들짝 놀랐다. 그는 어디가서 빠지지 않는 키의 쿠로오보다도 한뼘 정도가 더 큰 장신이었으며 외국인인 듯한 색채를 가진 남자였는데, 아무래도 거구의 남자 둘이 짙은 시선교환을 하고 있자니 위압적이었는지 샌드위치를 포장하는 직원의 표정이 좋지 않았다. 아, 아니여. 그가 어울리지 않게 안절부절하며 황급히 고개를 돌리자 그제서야 공기가 좀 트이는 듯한 착각마저 든다. 맛있게 드세요, 쿠로오는 고개를 까딱여보이고는 가게를 나왔다,

"저어, 잠시만요! 커피 마시러 갈래여?"

좀 나오고 싶었다.



"헉, 저는 하이바 리에프임다. 이상한 사람은 아닌데..."

이상한 사람이다. 틀림없었다. 적어도 일에 치여 예민할대로 예민한 쿠로오의 상식에서는 크게 벗어나 있었다. 쿠로오는 제 표정이 아주 화려하게 일그러져 있을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실은 한마디 쏘아붙여 시선을 떨구어낸 그 다음부터 초조하게 이쪽을 곁눈질하며 전전긍긍 해대는 게 온몸으로 '나 어설퍼요, 그리고 평범한 생각을 하는 중은 아니죠'를 광고하는 것과 다를 게 없었기에 이런 식의 대화는 눈치가 빠르고 상황에 민감한 쿠로오가 충분히 예상할 수 있었던 게 맞다. 그래도, 안다고 덜 당황스러운 건 아니지. 쿠로오에게는 재차 강조하되 생초면의 무례한 남자에게서 온 데이트 신청에 응할 생각이 없었다. 제로.

서투르다. 서툴러.
쿠로오는 백구십도 넘어보이는 남자의 회색 정장 뒤로 완전히 굳은 여종업원에게 어색하게 미소를 지어보이곤 그대로 문을 열었다.





전화가 걸려온다. 발신자는 야쿠 모리스케.

─옆에 누구 있어?

누가 있기야 있지. 하지만 보통의 경우 지나가는 행인 1을 동료로 여기지는 않는다. 지나가는, 보다는 따라오는 이라는 표현이 더 맞겠다. 아까의 그 이상한 남자, 하이바 리에프는 샌드위치 집 가게 문이 닫히고 정확히 삼초의 텀을 주더니 호기롭게 열어젖혀 줄곧 뒤를 따라오는 중이었다. 쟤 도대체 왜 저러는 거지? 굳이 기척을 숨기거나 티를 내지 않으려는 노력도 없이 대놓고 삼보 뒤에서 걷는 탓에 신경이 안 쓰일 리가 없는 장신을 완전히 무시해 보기로 다짐한지 오분도 지나지 않았다. 그래, 진짜 무시하자. 쟤는 아무튼 동료가 아니었고, 쿠로오의 고민은 1초가 채 되지 못했다. 대답은, 아니.

곧 야쿠의 한껏 낮춘 목소리가 수화기를 타고 넘어왔다. 새로 온다는 본부장 말인데, 로 시작하는 오피스 가쉽이었다. 쿠로오는 그런 데에 별 흥미를 두는 남자가 아니었지만 야쿠 또한 그랬다. 이런 말을 할 애가 아닌데. 잠자코 들어보기로 결정을 내린 쿠로오가 힐끔, 리에프 쪽을 곁눈질하더니 전화를 받는다.

─응, 왜?
─낙하산이래.

엑. 순식간에 멍한 표정이 되어 눈을 끔뻑였다. 웬 낙하산? '낙하산'들은 이미 회사 내에 더러 있었다. 실력에 관계없이 인맥과 뒷공작으로 높은 자리를 꿰차고는 하릴없이 짐 처럼 굴어대는 것이 여간 짜증나는 게 아니다. 하지만 쿠로오나 야쿠나 각자의 일에만 충실하는 스타일인지라 회사 안의 험담이나 이러쿵 저러쿵에 끼어들 줄을 모르는 남자들이었고 결론은 별 관심을 두지 않았었던 것이다. 아니, 그 전에 암만 낙하산이라도 본부장까지 갈 수 있는 거냐고?

─완전 문외한은 아니고, 러시아쪽 지부에 있었다나봐. 그런데 문제는...



사라졌어.



백구십도 넘는데다가 혼혈이라 누가 봐도 외국인처럼 생겨서 눈에 안띄는 스타일도 아닌데 완전 연락두절이야. 도착한지 몇시간 째인데 코빼기도 안보여서 완전 난리났거든. 완전 제멋대로 인가봐.

쿠로오는 그 자리에 못박힌 듯 움직일 수 없었다.





인연의 시작이 아주 사소해도 된다지만, 이건 사소함이 아니라 부적절함이었다. 쿠로오는 침착하게 샌드위치를 들고 고개를 약간만 틀어 누가보아도 통화내용의 '백구십이 넘는 데다가 혼혈이라 누가 보아도 외국인 처럼 생긴' 남자를 곁눈질했다. 아무래도 맞는 것 같다, 새로오기로 한 본부장. 무려 본부장이었다. 본부장이라는 거, 이렇게 가까운 거였어? 완전 먼나라 이야기여야 하는 게 아니었냐고. 쿠로오는 나름 괜찮은 준엘리트의 코스를 타고 서른줄을 밟기 전임에도 꽤 빠른 승진을 해 온 쿠로오가 보기에도 이십대의 본부장은 그 허들이 거의 베를린 장벽 급이다. 게다가 잠깐 봤음에도 강렬하게 남은 얼굴은 어떻게 재도 자신보다 어린 티가 났다. 연륜이라는 단어가 연상조차 되지 않는 그 언행이 강력하게 영향을 미친 탓도 있겠지만. 행동이 어린 이유는, 외국에서 와서인가. 그 나이에 본부장씩이나 되려면 어지간한 낙하산이 아니고서야 힘들 터였다. 아무리 그래도 부임 첫날부터 몇시간을 잠수를 타며 연락조차 두절한 채 샌드위치 가게에 박혀있는 건 정말이지 상식 외다. 좀 심하지 않았나. 쿠로오는 잘생기면 잘생겼지 완전히 멀쩡하던 얼굴을 다시 한번 힐끗 뒤돌아 보았다.


"커피 마시러 가주세여."

"으, 악! 씨발 깜짝…"


…이야. 고개를 반쯤 틀자마자 불쑥 들이밀어진 '본부장'의 얼굴에 쿠로오가 저도 모르게 반발짝을 펄쩍 뛰어 물러났다. 쿠로오는 약 삼초 후 제가 욕을 뱉은 상대가 누구인지에 대한 자각에 머리를 비운다. 아, 무념무상. 대체 어떻게 이렇게 꼬일 수 있는건지, 야근에 시달리던 평범한 직장인이 잠깐의 휴식으로 숨통이라도 틔우려 회사 밖을 나온지 삼십분도 되지 않은 찰나의 전개였다. 숨막히게 빠르고 말도 안되는 게 여느 막장 드라마가 부럽지 않다.

쿠로오? 핸드폰의 스피커 너머로 야쿠의 목소리가 점점 아득해졌다. 머릿속에서 착착 진행되는 중인 계산이 못해도 한 시간 뒤면 회사에서 까마득한 상사와 직원의 관계로 만나게 될 얼굴에게 취해야 할 행동을 본능에게 경고한다. 아, 문득 멍하게 그 녹안을 바라보던 쿠로오가 간신히 내뱉었다, 금방 들어갈게.

─그 빌어먹을 본부장이랑, 같이.




"어디로, ... 어디로 갈까요."

지금 이 순간 쿠로오의 머릿속에 스친 것은 다른 게 아니라 오전 내내 보아야 했던 워드와 엑셀에 가득하던 숫자들이었다. 이율, 계산치, 퍼센트에이지, 합계, 총합. 쿠로오는 문득 자신이 그 한가운데에 깊이도 빠져버렸다는 생각을 했다.





​* 하편에 대한 계획이 있기는 있으나 아주 까마득한 먼 일이 될 것이며... 수정을 통해 상 하를 붙일 수도, 하편을 따로 올릴 수도 있지만 아직 정해진 바는 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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