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쿠로] 거짓말 대신

HQ

2016. 5. 23. 23:52

​* 5/23 : 일본의 키스데이





하나,
둘,
셋.

시곗바늘이 기어코 열한시 오십분을 가리켰다. 그리고 저 바보 부엉이는, 잔다, 잔다, 잔다. …. 안잔다.





저 바보가. 쿠로오 테츠로는 손에 든 담배가 구깃해지는 걸 뒤늦게서야 자각하고 손에 힘을 풀었다. 반쯤 접힌 담배는 구겨지긴 했지만 꽤 널널하게 태울 수 있었음에도 쿠로오는 신경질적으로 재떨이에 담배 끝을 비벼 껐다. 뒤늦게야 많이 비싸진 담뱃값과, 학생이라는 제 신분이 연관지어졌지만 쿠로오는 미간을 찌푸리며 새 담배를 꺼내 물고 라이터를 켰다. 어디선가 불어 온 바람에 불꽃이 제 엄지손가락으로 훅끼쳤다. 아, 짜증나. 23일의 밤이 거의 기울고 있었다. 그것도 아주 마음에 안 드는 방향으로. 쿠로오는 남은 십분마저 지금과 다름이 없을 거라는, 아주 불안한 예감에 사로잡혔다.


고교 삼학년을 마치자마자 쿠로오가 한 것은 미련을 끊는 일이었다. 고등학교 때부터 몰래, 조금씩 피워 오던 담배와, 진로로 삼을 수 없을 배구. 그리고 보쿠토 코타로가 그 대상이었다.

결과는 단 하나도 성공하지 못함.

쿠로오는 며칠에 한번씩 편의점에서 신분증을 내밀었고, 자취방에는 자연히 재떨이 몇개가 놓여있었다. 그는 여전히 옷장 가장 아래칸에 잘 개어둔 배구부 웜업이나 경기복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는, 보쿠토 코타로의 룸메이트 제안을 시원하게 차버리지 못했다. 여기서부터 모든 게 다 잘못됐다고 해도 틀리지 않았을 심각한 미련의 연장점이었다.

그래서, 결국 아무것도 성공한 것은 없었다. 쿠로오 테츠로는 여전히 스스로의 한심함을 견디지 못하고 몸부림치면서도 보쿠토 코타로를 상대로 자위를 했다.





사건의 발단은 단순하게도 대학 동기였다. 지나가면서 툭 던진 말로 고요한 호수에 파장을 일으키고, 아무튼 유치한 스토리 여럿에 스타트를 끊어주기 딱 알맞은 지나가는 행인 1, 같은 존재. 야, 너네 그거 알아? 로 시작했던 하교길의 같은 과 누구누구는 금세 방향이 다르다며 다른 노선의 버스를 타고 떠나갔다.

"오늘, 키스데이래. 짝사랑하는 애랑 키스하면 사랑이 이루어진다는데 너희는 또 칼같이 집에갈 거지? 여자애들 좀 만나러 가고 그래라."

같은 대학 남학생은 엑스트라 역에 더없이 잘 어울리는 남자였다. 툭 던진 말은 딱히 별 의미 없이 히히덕거리기 딱 좋은 주제였지만 잔잔해서 위태로웠던 쿠로오의 짝사랑에 파장을 일으키기에도 또한 더 없이 좋은 소재였던 것이다. 원래 사람이 좀 절박하면 아무 데나 매달리곤 한다지만, 내가 이렇게 절박했었나? 버스, 골목길, 현관. 평소와 같이 장난을 치며 차례차례 지나 집에 도착할 때까지. 쿠로오는 놀랍도록 상대의 입술을 의식하는 스스로에 절망했다. 아니, 내가 이럴때가 아닌데. 보쿠토 특유의 시원하게 올라가는 입꼬리로 웃는 웃음에서 입술만 보여 빤히 바라볼 수 밖에 없다. 몰래 몇번을 한숨 쉬었는지. 쿠로오는 어디 안좋냐는 그의 물음에 결국,



보쿠토 코타로는 고등학교를 졸업했지만 배구를 계속한다. 전국구 스파이커를 마다하는 팀은 없었고 좋아하고 잘하는 진로를 갖자는 뻔한 교과서적 진로 선택에서 어쩌다보니 승자의 위치를 가졌다. 가지고 싶은 걸 못 가져 본 적이 없는 남자였다. 단 하나 빼고.

그는 삼년 째 짝사랑 중이었다.

아카아시는 선배처럼 거짓말을 못하는 사람이 그런 걸 잘도 숨겨왔다며 신기함을 감추지 않았다. 일학년, 쿠로오 테츠로가 부상 당한 주전 선배 대신 네트 저편에 섰던 첫 여름 합숙에서 부터 이어진 장장 삼년의 짝사랑이다. 쿠로오 테츠로가 미련을 버리는 데 실패했다면 보쿠토는 실패한 적이 없었다. 그저 내려올 생각이 없던 배구 코트와 같은 맥락이었던 것 같다. 그는 그만 둘 생각도, 쿠로오가 자길 사랑해주기를 바라지도 않았다. 그저 그렇게 이어 온.



오늘, 키스데이래.
오늘, 키스데이.
키스데이...
키스.

쿠로오랑, 키스...

"너야말로 뭐 있냐? 왜 그렇게 멍하냐."

그는 그렇게 묵묵한 짝사랑을 담담하게 이어가는 법을 알면서도, 여전히 넘치는 감정에 유난하지 못하는 법을 몰랐다.

"너무 더워서 그래."

"으응, 오늘 진짜 덥네."





쿠로오 테츠로가 하얀 피부를 가진 건 아니었지만 유난히 붉은 입술은 종종 보쿠토의 섹스판타지에 단골 손님이 되어주곤 했다. 입은 작은 편인 그 입술을 벌리고, 젖으면 더 붉게... 상상 속에서는 뭔들 못하겠냐며 온갖 파렴치한 망상의 대상을 다 하던 그 입술이 '키스데이'라는 명분에 지나치게 강조 되어버렸다. 그 말을 듣고 나서 쭉, 온종일. 오물오물 움직이는 입술로만 시선이 꽂혀서 미치기 일보직전이라 해도 이상할 게 없었다. 쿠로오가 눈치채지 못한 것에 그저 감사할 뿐인 것이다. 정작 그 쿠로오 또한 같은 열병과 같은 병세에 시달리고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은 꿈에도 모를테지만, 몇년을 이어져 온 양방향의 짝사랑은 원래 아무 이유없이 삽을 들고 땅을 파는 것과 그 효율성에서 다름이 없었다. 양쪽의 사랑의 크기가 너무 컸다는 게 미약하게나마 이유가 되어줄 수 있는 건 둘다 '친구'로서의 서로라도 잃을 수 없다는 인식이 너무 강했다. 어쩌면 같은 이유였다. 짝사랑해 온 상대에게 오늘이 가기 전에 입을 맞추면, 이루어질 수 있다는 허무맹랑한 미신 한 조각에 그렇게 희망을 걸어버린 게.


"안 자?"

"담배 한 대만 피우고."


대화가 평소와 다름없이 매끄럽게 이어지지 않아 또 몇번째인지 모를 정적이 흘렀다. 이 상황에서 이 둘이 자각해야 하는 것은, 어제까지만 해도 '보쿠토 코타로와 쿠로오 테츠로는 정적 속에서 몇시간이고 같이 있어도 어색하지 않은 사이였다'는 거지만 아무튼 기억을 못하고 있다. 어색함이 폐부를 꾹꾹 짓눌렀다. 서로의 숨결, 모든 움직임, 작은 것들 하나하나. 하다 못해 털어내지만 끈덕지게 붙어 떨어지지 않는 담뱃재까지. 의식하는 순간 의식하는 것이고 의식하지 않으려는 순간까지 의식하는 것이라는 문장이 뇌를 채운다. 이쯤되면 슬슬 서로가 서로를 어색해하고 있다는 걸 깨달을 법도 한데, 지금은 눈치를 살피느라 정신이 없었다. 차라리 눈치게임을 할래.


유난히 시계의 초침소리가 크고, 달빛이 밝았다.
그리고, 유난히 예뻐보였다.


언제 자? 몰라. 더이상 의미 없는 질문은 상대가 잠이 들면 도둑키스라도 입을 맞춰보려던 원대하고도 부질없는 계획의 마지막 미련이었다. 검은 고양이가 지금 당장 잠에 들어줬으면 싶지만, 안 잘 것 같다. 같은 대답을 일곱번째 반복 중이라는 걸 잊은 쿠로오는 보쿠토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저 바보 부엉이가 자길 바랐지만, 안 잘 것 같지?

네트를 사이에 두고 수 없이 많은 공을 주고 받으며 쌓은 친구라는 거대한 유대를 품고 있었기에, 짝사랑은 누구보다 절절하면서도 가벼웠다. 지극히 쌍방향이면서 일방적이라, 상대에게 뭔가를 바라본 적이 없었던 것이다. 키스데이가 지나기 전에 도둑키스를 할 수 있도록 잠에 들어줘, 가 상대에게 품어 본 가장 큰 바람이었고, 염원이었다. 시계 초침이 한바퀴를 돌았고, 가장 달고 건조한 날의 마지막 오 분이 심장을 태웠다. 쿠로오 테츠로는 다시 한번 넘치는 감정을 비워낼 준비를 할 수 밖에 없었다.

비워내고, 키스를 바라지 않는 사랑이 계속 되기를. 언젠가 아름답게 끝맺고 나면, 내가 그 때 그래서 걔가 자기를 참 바랐었는데. 라고 할 수 있기를.


"쿠로오."

"안 잔다고."

"키스할래?"


그러니까, 달이 너무 밝아서. 보쿠토는 제 한심한 이유가 입 밖으로 튀어나가지 않았음에 감사했다. 후, 하고 길게 뱉어져 방 안을 뿌옇게 태우던 연기가 뚝 멎었다. 응, 그 입술에. 키스하고 싶다.

오늘은 나랑 키스했다간 쿠로오 씨랑 결혼해야 할 지도 모르는데.

평소처럼 농담을 던지며 빙글빙글 웃는 쿠로오의 입술은 이 순간에 너무 사랑스러웠다. 그게 문제라고. 보쿠토 코타로가 그의 멱살을 쥐어 잡고 입술을 덮쳤고, 쿠로오는 들고 있던 거의 다 태운 담배를 바닥에 떨어트렸다. 미처 다 뱉지 못한 담배 연기가 남아 쓴 맛이 도는 키스였다.

보쿠토 코타로는 비흡연자였다. 그런데 나, 담배 나가서 피우기 싫은데. 무작정 건넸던 동거 제안에 대한 쿠로오의 답은 첫 마디가 그거였다. 쿠로오의 담배 취향은 결코 소프트하지 않았다. 그 대신 담배를 사러 갔을 때 '제일 순한 걸로 주세요'라는 주문으로 사다 주었던 담배는 하나가 빠진 채 여전히 그의 서랍 속에 있었고 쿠로오는 다시는 그에게 담배를 사다달라고 부탁하지 않는다. 그 연기가 빠져나오는 입술을 사랑하지 않았더라면 보쿠토는 몇달간의 독한 간접흡연을 구태여 견디지 않았을 터였다. 쿠로오는 보쿠토를 위해 한번에 세개 이상의 담배를 연달아 피우지 않았다. 그건 배려가 아니라, 너무 순해서 입맛에 맞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버리지 못한 그 담배와 같은 종류의 무언가였다. 너무 간지러워 사랑이라는 단어를 붙이지 못하는 그런 무언가. 5월 23일은 일본에서 키스데이라는 웃기지만 달달한 다른 이름이 있었지만 쿠로오에게는 한 없이 쓰다. 그제서야 쿠로오는 오늘 자신이 줄줄이 피운 담배가 벌써 여섯 개비 째라는 걸 깨달았다. 쿠로오는 약하게 후회했고, 보쿠토는 거기서 미약한 안도를 얻었다. 머리가 아플 정도로 피워댄 독한 연기에 내가 살짝 미쳤었나봐. 그런 변명을 할 수 있겠다.



열한시 오십팔분이었다. 보쿠토의 머릿속에는 짝사랑이 이루어질까요? 가 아닌 키스가 끝났을 때 입 밖에 낼 거짓말이 먼저 떠올라 있었다.



입술 하나는 달았고, 하나는 썼다. 결국 엉겨붙어 이도저도 아닌 맛이 되어버렸지만 120초를 남기고 둘은 입을 맞췄다. 키스 안해본 거 티나는데. 얼이 빠져 가만히 입술을 맞대고 있던 쿠로오가 결국 웃음을 터뜨렸다. 픽, 새는 바람에 보쿠토가 움찔 놀라며 옷깃을 꽉 쥐었던 손에 힘을 풀어버리는 탓에 이가 맞닿을 정도로 가깝던 입술이 힘없이 툭, 떨어졌다. 쿠로오가 처음으로 본 것은 욕정에 당황마저 가려진 황금색 눈이었다.

"그러니까... 너. 음, 담배..."

조류의 머리에 뭘 더 기대하겠어. 쿠로오의 본능과, 그의 구겨지고 늘어난 티셔츠 목깃이 외치고 있었다. 이번에는 네가 잡아, 힘껏 입 맞추라고.





키스데이가 끝났다. 짝사랑의 끝에서 둘은 여전히 입을 맞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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