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쿠아카/커미션] 흑백의 부등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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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 5. 18. 18:25
* ㅎㅅ님 커미션입니다 그만넣어
아카아시 케이지의 영화 취향은 유난한 편이다. 단정한 얼굴에 끝맺음이 확실한 성격은 어느 정도 건조한 편이었지만, 주말이면 오래 된 DVD를 늘어놓고 그 앞을 떠날 줄 모르는 그가 가장 선호하는 재생목록은 의외로 찰리 채플린이었다.
서로를 사랑하는 연인들이 으레 그렇듯이, 보쿠토 코타로와 아카아시 케이지는 몸이 부서질 듯한 격렬한 정사를 나눌 때가 있었다. 하지만 ─순전히 마구잡이로 휘둘려 평정을 유지하기 힘들다는 이유이긴 하다만─ 아카아시는 사랑의 크기를 확인하는 것 마냥 느릿하고 흘러 넘치는 정사와, 그 끝을 알리는 연인과의 가벼운 입맞춤. 나른한 후희와 벗은 채 나란히 앉아 가벼운 생각으로 틀어놓은 DVD 소리에 반쯤을 묻는 대화를 사랑했다.
"저런 거, 재미있어?"
몇번을 봤는지 제목을 네이밍한 라벨이 너덜너덜한 시티라이트는 한 웅큼의 색채도 없이 자잘한 노이즈와 함께 흑백의 이면을 마음껏 펼치는 중이었다. 꽤 옛날의 비디오는 흑백 장면과 부자연스러울 정도로 우스꽝스러운 연기에, 이런데 쓰이는 낱말이 아닐텐데도 블랙코미디라는 단어를 자꾸 상기시켰다. 애초에 아카아시, 네가 코미디 취향이라는 것부터 넌센스야. 평소에 시끄러운 보쿠토는 오히려 이런 취향이 아닌 건지 제 어깨에 기댄 아카아시의 희고 긴 손을 만지작대는 것에 여념이 없었다.
그러면 아카아시는 꽤 부드러운 표정과 상반되게 무뚝뚝한 목소리로 사람을 선입견으로 대하면 안되는 겁니다 보쿠토상. 하고 주의를 주지만, 아카아시는 흑백영화에 불만을 가져도 여전히 따뜻한 부엉이의 날개 아래를 사랑했다.
색이 없는 세상은 어떤 걸까요.
우스갯소리로도 비생산적인 질문을 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 아카아시가 그런 말을 한번 했던 적이 있다. 그때는 글쎄, 너무 오래 전이라 기억도 나지 않는다며 가볍게 넘겨버렸던 보쿠토는 그의 말대로 풍부한 색채 속에서 사는 남자였다. 벌써 몇 년이 되었지, 5년? 인생을 배구에 열정을 쏟기 전과 후로 나누는 단세포에게 아카아시는 막 집착하기 시작한 배구공이 무슨 색인지를 보여준 사람이었다. 교문 앞에서 '운명의 상대'라는 것을 마주치고, 학기가 시작한 가을의 단풍빛을 처음 볼 수 있었던 그 날부터. 아카아시는 보쿠토에게 절대적 동행자였다.
오래됐구나, 정말. 금방이라도 날개를 쭉 펴고 날아가버릴 놈이었는데.
서로의 눈이 마주쳤을 때 이 세상의 색은 비로소 둘에게 찾아왔다. 어떻게 보아도 둘의 운명의 결속을 알리는 분홍빛 신호. 보쿠토의 거대한 날개와 그 위에 짊어 진 열망은 모르는 이의 눈에도 선명했고, 아카아시 케이지는 그래서 사랑에 빠졌다.
그래서,
사랑에 빠졌다.
우리가 사랑하는 건 단순히 운명이라서일까요? 단순히 색을 볼 수 있어서, 우리는 서로를 보는 걸까요. 감정을 배제한 듯한 물음에 토라진 보쿠토는 거의 삼일 동안 상한 기분을 구태여 숨기지 않고 볼멘소리를 해댔다. 결국 사과가 녹아든 입맞춤, 부드러운 시선과 맞잡은 두 손에 일상은 다시 찾아왔지만 아카아시는 다시는 그런 의문을 품지 않는다.
답을 찾았기 때문이었다. 단순히 서로의 시야에 색을 입혔기 때문에, 우리의 시야에 너밖에 없는 거야? 봄빛과 여름빛, 가을빛과 겨울빛이 허락 된 것은 운명의 상대와 사랑에 빠진 연인들 뿐인 이 세상에서 흔하디 흔한 클리셰. 색을 마주하는 순간은 한없이 달콤하고, 온 세상을 거머쥔 듯 벅차오르는 행복에 젖는다. 잠식하여 다른 이의 여지를 모두 삼켜버리는 줄도 모르고. 색으로 이어진 연인들은 종종 그런 생각들을 하곤 한다. 네가 아니었다면 나는, 너일 수 밖에 없는 이유라던가. 그런 잡념들이 당장 머리 위의 하늘이 시리게 푸른 탓이 아니더라도 비생산적인 몽상인 이유는 아마,
사랑하니까.
아카아시는 곧 자신이 다르지 않음을 자각하고 그에 대한 생각을 아꼈다. 아니에요. 내게 꽃잎의 붉음이나 하늘의 푸름을 보여줄 수 있는 게 선배 뿐이라서가 아니에요. 아카아시는 독처럼 그를 사랑했다.
운동은, 지켜봐야 알겠지만. 일단 재활을 열심히 하세요.
그 말이 곧 더이상 이어나가지 못할 배구를 뜻한다는 것을 눈치챘을 때, 아카아시는 어떠한 절망적인 생각보다 먼저 안도를 느꼈다. 선배가, 지금 바빠서 다행이에요. 독처럼, 이라는 수식어가 가장 유난할 때 그것은 정말로 독이 되었다. 하늘의 지배자는 그 뜻 만큼이나 고아하고 커다란 날개에 기대 난다. 그런 그의 앞길을 여는 사람이 자신이며, 그의 기대 또한 그렇다는 것에 기뻐했다. 최고의 스파이커에게 하나뿐인 세터를 열망했다.
"헤이, 아카아시! 얼른 졸업하고 오라고. 기다릴 수 있으니까!"
언젠가 그가 했던 말 처럼 보쿠토 코타로에게 '아카아시 케이지가 올려주지 않은 공'이나, '아카아시 케이지가 없는 코트 위'는 1년을 참고 견디면 없을 것 정도일텐데. 자신보다 뛰어난 세터를 세우기보다 밤을 새워 연습하는 것. 그를 사랑했기에 품은 욕심의 전부였다. 아카아시는 더이상 그와 함께 설 수 없음을 직감했다. 단순히 인대가 완전히 망가져 오래 뛸 수도, 빠르게 반응할 수도 없기 때문만은 아닌 듯 했다. 더이상 공을 만질 수 없다는 사실에 절망하지 못하는 자신이 비참하고도 안도가 되어 입술을 피가 나게 깨문다. 오래 전부터 거대한 부엉이의 발목을 옭아매고 있음을 알고 있었기에, 사랑에서 비롯한 욕심을 그만 둘 때가 되었다고 생각했을 뿐이다. 놓아줄 때가 되었다고.
스스로의 한계를 알고 있다는 게 득이 될지 독이 될지는 분명하지 않지만 한가지 확실한 건 그에게 득이 된다면 자신은 독이라도 달게 삼킬 것이라는 것. 그저 그걸로 됐다. 아카아시는 아직도 답장을 하지 않은 여덟시간 전의 메일을 빤히 바라보다가 휴대전화를 꺼버렸다. 정리가 좀 필요해요, 이미 다 끝나버린 정리가.
실은 이별에 담담할 자신이 싫었다.
다시 오겠습니다, 하는 한 마디에 처절한 상념들을 모두 지웠다. 재활치료, 성공적으로 한다 해도 운동은 못할 것 같아요. 예전같이 움직일 수 없을 것 같나요? 아니요, 제가 설 코트와 이별할 예정이라서요. 거기가 아니면 전 안되거든요.
혼자 하는 이별만큼 비참한 것은 없다. 둘이 시작해 하나가 끝내는 이별 방식에 아카아시는 익숙하지 못했다. 삼학년, 주장인 그가 갑자기 배구부에서 빠져버렸지만 아카아시는 진학반이었기에 모두가 씁쓸하게 침묵하는 가운데. 가장 입 안이 쓴 것은 그 자신이었다. 왜 아닐까, 모두가 오해 속에서 침묵하는 가운데 진실을 세울 수 없는 위치인데.
아카아시 케이지가 사라진지 사흘이 지났다. 지난 삼년간 빠짐없이 온기로 채워져있던 부엉이의 옆자리가 비었다.
너 미쳤어? 맺힌 핏방울이 터져 손가락의 반이 새빨갛게 젖은 손목을 잡아채이고 나서야 보쿠토는 무의식 적으로 물어 뜯어 아작을 내던 손끝에서 입술을 뗐다. 혀끝에서 맴돌던 비릿하고 찝질한 맛을 느끼지도 못했었는지 입술에 번진 붉은 피가 멍한 표정에 어울리지 않는다. 쿠로오 테츠로는 말 없이 그런 보쿠토의 손을 손수건으로 감아 눌렀다. 어떻게 물어뜯어야 이 만큼이 나는 건지 나도 좀 가르쳐주라. 배어나는 피에 금세 젖은 손수건이 검붉게 물든다.
삼일간 보쿠토 코타로는 거의 제 정신이 아니었다. 아카아시가 연락이 안된다며 하루 종일 시끄럽게 굴던 보쿠토는 결국 그의 집으로 찾아갔었다. 만났어? 아니. 그게 대화의 끝이었고, 다음날 부터 그는 초조함에 완전히 다른 사람인 것 마냥 굴었다.
평정을 잃은 보쿠토 코타로라는 건 아주 잦은 일이었지만 그걸 다스려줄 아카아시가 없다는 것이 문제였다. 둥근 편인 눈매는 언제나 장난스럽거나 순수한 열정을 내비치곤 했는데, 그의 주변인들은 그 눈이 그렇게 매섭고 잔인하게 번뜩일 수 있다는 걸 이번에 처음 알았다. 탁하고 고요하게 가라앉은 황금빛 눈동자는 그 빛깔이 무거웠다. 종종 넋을 빼놓고 걷거나, 멍한 상태로 가만히 있고. 초조함을 숨길 생각도 않고 여실히 드러내며 손톱을 물어뜯다가도 한번씩 싸늘하게 가라앉아 발톱을 가는 듯한 부엉이의 모습에 사라진 아카아시의 행방은 절실해지기만 했다.
어째서? 아카아시, 내게서 떠나간 거야?
보쿠토가 찾아간 아카아시의 방은 텅 비어있었다. 온기조차 찾아 볼 수 없이.
쿠로오 테츠로가 테이블 위에 아무렇게나 던져 두고 씻으러 가 버린 손수건에는 누구의 것인지 모를 핏자국이 검붉게 말라붙어 굳어있었다. 바랜 듯한 색감은 붉은 기가 많이 빠져 거의 갈색으로 보였다. 아카아시는 버석하게 말라버린 손수건을 들고 먹빛 핏자국을 바라보았다. 앞에서는 쿠로오의 스크린에서 아카아시의 DVD 테이프가 재생되고 있었다. 여전히 흑과 백 만이 존재하는 코미디, 시티라이트.
"뭐해?"
"쿠로오 씨."
잘했다. 보쿠토가 날 하늘은 푸르지 않아도 높아야했다. 아카아시는 스스로에게 몇번이고 되뇌이는 '잘했다'에 좌절했다. 틀리지 않은 선택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결국 현실이 제공한 도피처는 쿠로오 테츠로였고, 그는 아무 말 없이 아카아시를 제 집에 들였다. 현실에서 도망칠 방법은 물론 없었다. 챙겨온 것은 찰리 채플린의 흑백영화가 담긴 DVD, 교복이 아닌 옷가지들. 고요함과 공생하며 아카아시는 홀로 이별하는 중이었다. 그는 손수건의 핏자국이 붉은 기가 거의 사라진 잿빛이라는 것에 애써 담담하고 있다. 어제는 창가에 놓인 화분의 잎사귀가 초록색이라는 것을 잃어버렸고, 오늘 아침에는 아침해가 눈부신 하늘이 푸른색이라는 것을 잃어버렸다. 붉은 입술, 붉은 피. 잊어야 할 것들. 가끔 덤덤하게 뱉은 사랑고백에 터질 듯 붉게 변할 보쿠토의 얼굴을 볼 수 없다, 에서 아카아시는.
"잊혀져 가는, 모든 것이 그리워져요."
후두둑 떨어지는 그의 눈물은 참고 참아 꾹꾹 눌러담은 감정이 터져나온 만큼 찬란한 오색빛에 일그러져있었다. 아, 아파요. 감정의 파편과, 빛깔의 조각들. 깨어져 나온 유리조각같은 '색'들이 아카아시를 찢어놓는다. 가장 황홀한 사랑의 한 가운데에서 아카아시는 서 있었다. 보쿠토가 보였고, 멈추지 않는 눈물을 지우려 눈을 깜빡이면, 화려하게 수놓인 색들이 그를 집어삼켰다. 숨도 쉬지 못한 채 가슴께를 움켜쥐고 덜덜 떤다. 제가 뱉어낸 색들이 바닥으로 추락했다. 완전히 잿빛으로 물들어버릴 세상이 무서워, 부엉이의 날개 밑 그 온기가 가슴에 사무쳤다. 혼자만의 이별은 익숙하지 못하다. 하지만 그것보다도 보쿠토를 뺀 하루에 익숙하지 못했다. 아마 영원히 익숙해지지 못할 것이라고, 잊혀져가는 중인 색깔들이 알려주었다. 시작은 둘이었는데. 혼자 끝내게 되어 죄송합니다. 드물게 완전히 무너져버린 그가 손으로 눈을 덮는다. 찾아오는 암전은 꼭 똑같은 먹색이다.
우스꽝스러운 음악이 흘러나와 고개를 들면 까만 수염을 붙인 배우가 넘어지는 연기를 하는 모습이 보였다. 흑백영화.
필연이 되어버린 흑백영화는 더이상 편안하지 않았다.
보쿠토 코타로는 깨질 듯한 아픔에 눈을 떴다. 초조함과 그리움으로 얼룩졌던 세상은 소름끼치게 고요했다. 평소 그가 좋아하던 시끄러운 히어로 영화가 꼭 아카아시가 좋아하던 흑과 백의 프레임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우리는, 이별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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