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쿠로] 극비의 공략지점
HQ
2016. 5. 14. 23:50
Q. 상대의 스킨십이 부끄러울 때는?
A. 오래 돼서 그런가, 딱히 없는데.
쿠로오 테츠로와 보쿠토 코타로는 나란히 도쿄로 대학을 진학하기 한참 전부터, 길을 걸을 때 손을 잡는다거나 입가에 묻은 크림 따위를 혀로 핥아 닦아주는 등의 몹쓸 애정행각이 당최 사그라들 줄을 몰랐다. 아는 사람들끼리는 소문이 자자한 한쌍의 바퀴벌레가 되어버린 그들이 언제는 주위 시선을 신경 쓰는 작자들이었냐 한다면 절대 아니니까, 누구라도 그들에게 발을 건다거나 하지 않았지만.
"저기, 테츠로 군은 코타로 군과 무슨 관계야?"
"웨-이. 궁금해? 우리는... 글쎄, 진한 관계?"
능글맞게도 모든 곤란한 질문을 유들유들하게 넘기는 재주가 있었던 것이 강하게 작용했기 때문일까. 아무튼 둘의 지나치게 가까운 사이를 의심하는 사람은 많아도 교제를 확신하고 거리를 두는 사람은 없더랬다. 고교 배구부 동기들은 징그럽다며 '부정하는 법도 좀 알고 그래라', 하고 종종 면박을 주지만 결국 그들도 일년을 훌쩍 넘게 잘도 사귀는구나 싶어 고개를 끄덕이고 만다. 처음부터 180후반대의 남학생 둘을 마냥 축복한 건 아니나 거리낌 없이 서로 허리를 더듬어 댄다던가, 손을 잡는 행위에는 '쟤들이 좋다는데 어쩌겠어' 해버리는 것이다. 체념섞인 납득이지만 그러니까, 아무튼 잘 어울리는 천생연분.
언젠가 보쿠토가 쿠로오의 튼 입술을 촉촉하게 해주겠다며 달려들어 작살을 내어놨을 때가 있었다. 겉만 놓고 보기에 꽤나 원초적인 단순함이 철철 흘러넘치는 만큼 그 둘이 엉겨 붙어 혀나 살을 섞을 땐 정말로 육욕적이어져 버리곤 했는데, 키스라는 행위 또한 그 범주 안에 있었다. 주위에 사람만 없으면─있어도 한다는 게 함정이지만─한참을 서로의 입술을 물고 빨며 진득하게도 핥아댔다. 잇새에 입술을 물고 뜯듯이 당기는 것은 고사하고 뒷통수를 받쳐주어도 힘에 밀려 뒷걸음질 칠 만큼 진하게 탐한다. 그래놓고는 서로의 입술이 타액에 젖어 천박하리만치 번들거리면 그제서야 느릿느릿 눈을 뜨고 입술을 부볐다. 순식간에 사그라든 템포에 반쯤 내리 뜬 눈을 맞추며 천천히 맛을 보다 입술을 떼고 나면 아무렇지 않게 입가를 훔치고 다 흐트러진 옷 매무새를 정리하는 것이 그들의 키스 방식이었다.
쿠로오는 격정적으로 달려드는 보쿠토를 마주 안으며 코로 호흡하려 애를 쓰다가도 농염한 섹스어필이 주체가 안되는 분위기에 휩쓸려 산소부족으로 머리가 멍해질 때까지 키스에 동참하곤 했다. 연애는 쌍방이라고, 이쪽이라고 저 바보한테 입 맞추고 싶지 않은 건 아니랍니다. 그럼에도 언제나 우위는 달려드는 쪽이다. 결국 발개진 눈가로 헐떡이며 입술을 벌리면 파고드는 쪽은 숨이 막히지도 않는지, 에이스 스파이커의 폐활량에 대해 고찰하게 만들곤 하는 것이다. 결국 그렇게 진득하게 혀를 섞고 나면 느릿느릿 숨을 고르는 데에 입술을 맞대고 몇분을 할애했다. 고양이를 닮은 눈매가 살짝 풀려 녹진한 것이 가장 야할 때는 바로 이 때라고, 보쿠토 코타로는 종종 말한다.
"쿠로오는 부끄럽지 않아?"
"네? 뭐가?"
"키스하고 나서의 네 표정, 너무 야해서 가끔 내가 다 부끄럽다고!"
또 무슨 바보같은 말이야, 이상하게 일그러진 쿠로오의 표정에 보쿠토는 대놓고 뾰로통한 표정을 지었다. 스스로의 야함을 알지 못하는 것도 잘못이라고 생각합니다! 키스 중에는 금방이라도 자신을 눈빛으로 집어 삼켜 꼭꼭 씹어버릴 것 같은 눈을 하던 부엉이의 다시 시작된 바보같은 언사에 쿠로오는 대강 장단을 맞췄다.
"뭐, 너를 봐 온 게 몇년인데 이런 거 가지고 부끄러워해야 합니까?"
"하지만 키스를 그렇게 길고 야하게 하는데. 전혀 부끄러워하지 않는 쿠로오가 잘못했어!"
쿠로오는 확실히 스킨십에 무딘 편이었다. 밖에서 손을 잡고 입술을 부벼도 낄낄대며 넘어가지 얼굴을 붉히는 타입이 아니었다. 만약 붉어진 얼굴로 말을 더듬었다면─무척 귀여웠겠지만─ 그 긴 시간 동안 누구에게도 연애사실을 들키지 않는 기적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또 보쿠토는 확실히 그런 쿠로오에 어느 정도의 불만을 가지고 있었다. 친구처럼 편한 쿠로오가 너무 너무 사랑스러워 미칠 것 같기에 허덕이는 중인 건 맞지만, 그래도 가끔은 얼굴을 붉히는 쿠로오라던가, 당황하는 쿠로오라던가의 모습을 보고 싶었던 까닭이다. 물론 여기서 이유를 순전한 개인의 욕망이라 표현해도 틀리지 않다.
실은, 그런 쿠로오도 질색을 하는 게 하나 있긴 있다. 보쿠토는 오래 전부터 쿠로오가 사람이 바글바글한 놀이공원에서도 손을 잡고 걸어주면서 왜 영화관에서 나란히 앉아 손깍지를 끼는 것은 싫어하는 지에 대한 의문을 품고 있었다. 궁금해, 하고 물으면 쿠로오는 '그냥, 간지럽기도 하고 기분 별로야.' 라며 넘겼고, 기분이 좋지 않은 스킨십은 해도 별 의미가 없다는 주의인 보쿠토는 딱히 다시 시도한다거나 하지 않았기에 손깍지란 그저 그런 미지의 영역같은 행위가 되어버린지 오래였다.
그저 그런, 미지의 영역같은 행위.
그럴 때가 있었지.
운동을 하면서 몸에 열이 많은 편이 아니라는 게 굉장히 큰 메리트라는 건 같은 운동업계에 종사하는 사람들이라면 모두 알 것이다. 그리고 같은 몸에 열이 적은 부류의 사람들은 또한 알 것이다. 그런 사람들이 얼굴에 열이 오르면 참을 수 없이 화끈거리며 덥다는 것을. 쿠로오는 지금이 딱 그렇다는 것을 부정할 수 없었다. 귀가 온통 새빨개져 뜨거웠다. 머리칼을 정리하는 척 매만지다가 슬쩍 손을 대어 본 귓볼은 익은 듯 온도가 장난이 아니다. 이게 다 그 여자애 때문이라고.
어제자 강의가 끝나고 쿠로오는 몰려오는 피곤함에 늘어지게 하품을 하며 곧 끝나 보쿠토가 나올 강의실 쪽으로 걷고 있었다. 같은 대학, 같은 자취방, 동거. 정말 징글징글하게도 붙어다니는 둘에게 고교시절 동기들은 농담 반 진담 반으로 그러다 헤어지면 어쩌려고 떨어질 줄 모르냐는 질문을 했었다. 둘 중 어느 쪽도 전혀 생각해 본 적 없는 문제라는 게 밝혀지고 그 단순무식함에 부질없는 질문은 일단락 되었었지만, 정말 어쩌려고 그렇게 붙어다니는 건지 그 징그러움은 인정받았던 적이 있다.
같은 과는 아닌 여자애였다. 꽤 귀여운 얼굴에 맞지 않게 당돌한 성격이 대학생에게 잦아도 너무 잦았던 술자리 중 한 곳에서 마주친 적 있었던 것 같은.
"테츠로 군, 혹시 시간있어? 다른 볼일이 있는 건 아니고 같이 밥이나 먹고 싶은데."
"뜬금없이 적극적이십니다? 아, 나쁘단 건 아니고."
쿠로오 씨 적극적인 거 좋아하거든. 물론 지나치게 적극적이라 자주 피곤한 부엉이를 두고 한 말이었지만, 문제는 호랑이도 제 말을 하면 나온다고. 보쿠토 코타로 (20세, 남. 문제의 부엉이)가, 그 말을 들어버렸습니다.
쿠로오의 특이한 성감대가 들켜버린 것은 한달이 채 안되었다. 1년하고도 반을 향해 달려가는 중인 교제기간에 비하면 턱 없이 짧다. 보쿠토는 처음 그의 성감대를 눈치채고 난 다음날부터 근 삼일간 그동안 자신이 뭘했었던 거냐며 말도 안되는 한탄까지 늘어놓았었다. 왜냐하면,
"손가락 사이 만져지는 쿠로오, 장난아니게 야해! 귀엽다고, 완벽해!"
"제발 닥쳐."
완전 취향이니까. 어쩔 줄 몰라하며 짜증을 부리다가 결국 습관인 듯 큰 손바닥으로 얼굴을 가려버린다. 그러면 보쿠토는 늘 그 손등 위에 입을 맞췄다. 세상에서 가장 귀여운 내 연인이야.
쿠로오 테츠로의 성감대는 손가락 사이였다.
사건의 발단은 어이없게도 심야의 택시였다. 늦은 시간에 택시를 잡는 거, 정말 어렵긴 하지만. 쿠로오는 아직도 그 날 밤 일에 이를 갈았다. 그 날은 금요일이라서인지 거의 새벽을 향해가는 시간에도 불구하고 길가에는 택시를 잡는 사람들이나, 방황하는 사람들. 술에 떡이 된 취객들이 널리고 널렸었다. 정신없는 도쿄의 심야에서 쿠로오와 보쿠토는 아주 평범하게 술이나 몇잔 걸치고 농땡이를 피우다 차 시간을 놓친 대학생들이었고. 물론 그게 중요한 건 아니다. 그날 밤 둘은 아주 무사히 택시를 타고 자취방에 돌아왔는데, 그 과정에서 사소한 마찰이 하나 있었다는 게 화근일까. 정말 아주 작은 사소한 불씨.
"으앗."
택시를 잡으려 쿠로오의 손을 잡고 뛰던 보쿠토가 손깍지를 꼈다. 아주 미니멀한 이 문장에서 문제점을 찾으라면, 손을 풀 때 스치는 손가락의 감촉에 쿠로오가 뱉은 외마디 음성에 해답이 있었다. 일년 반 동안 깍지를 껴 손을 잡은 게 열 번이 채 안된다는 것도 놀랍지만, 그렇게 예민하면서 그 열번 동안 용케 참아냈다는 것도 놀랍다고 보쿠토 코타로는 회상한다.
쿠로오 스스로는 이상한 타이밍에 이상한 소리를 내 버렸다는 자각은 있었지만, 보쿠토 코타로는 무지막지한 둔치였다. 눈치라고는 개를 주려해도 없는 새끼라, 그가 끊임없이 쏟아내는 '뭐?', '왜?' 아님 '모르겠는데?' 따위의 눈새의 정석적 발언들에 쿠로오가 뒷목을 잡은 게 수십번이다. 어쩌면 그래서 쿠로오는 아주 안심했었다. 손가락 사이에 성감대가 있다니. 솔직히 듣기에 믿기 어렵고 말이 되지 않는 넌센스인데다가, 도심의 소음에 섞여 보쿠토가 '으앗'이라는 한 음절로 눈치를 까기에는 무리가 있다... 라고도 생각했었다.
"앗. 야, 하지마. 힉...! 손, 손 떼 멍청아!"
그게 크나큰 착각이라는 건 당장 그날 새벽, 귀가한 뒤 직행한 침대 위에서 증명되었다. 술도 들어갔겠다 건장한 청년 둘은 현관에서부터 부끄러움이라는 것도 모르고 서로에게 절박한 키스에 열중했었다. 결국 옷을 벗어던지고 하얀 시트 위에서 엉겨 붙으며, 질척한 분위기에 녹아들던 때였다. 급하긴 급했는지 짧은 전희와 조금 급한 듯 이어지는 삽입에는 불만을 제기하지 않는 쿠로오였지만, 뒤에서 골반을 틀어쥐더니 돌연 깍지를 껴 단단히도 붙들어오는 손에는 소름이 끼쳤다.
본능일까, 그때 느꼈던 것 같다. 오늘 밤이 조금 힘들거라고.
보쿠토 코타로가 꽤 가학적인 남자라는 건 누구도 모르는 사실이었다─심지어 그 자신까지도. 그리고 그날 밤에, 쿠로오 테츠로는 그의 가학성을 뼛속까지 경험해야했다. 사실 야생적인 본능이라던가, 원초적인 부분에서 눈치가 꽤 빠른 편이라는 게 쿠로오가 속으로만 생각하는 보쿠토 코타로다. 눈치라고는 개를 주려고 해도 없다는 이전의 평과 모순되지만 가끔 보이는 보쿠토의 본능적 면모에 종종 혀를 내두르곤 했던 것이다. 이번에도 그 '본능'이 작용했던 거겠지. 쿠로오는 순식간에 울고싶은 기분에 휩싸였다.
손가락 사이가 어떻게 성감대냐고 묻는다면, 쿠로오는 넘치게 많은 할 말들을 뱉기보다 침묵을 선택할 것이다. 그러니까 이걸 어떻게 말해, 간지럽다고? 불쾌하다고? 둘 다 아닌데.
배구를 하다 보면 넘어지는 일은 예삿일도 아니다. 살이 쓸려 얇게 벗겨져 나간 상처들도 잦았다. 속에서 슬슬 새살이 차오르기 시작하는 불그스름하고 연한 상처는 가볍게 건드리는 것 만으로도 움찔할 정도로 민감해 보통 붕대를 감았다. 그러니까, 그런 느낌. 이해할 수 있겠어? 보쿠토는 그런 질문에 일곱번이나 고개를 저었다.
그러니까, 미칠 것 같다고. 일곱번의 질문에 일곱번 고개를 저은 바보 부엉이 주제에 그는 이 대사에만은 깊은 이해를 보였다. 그건 나도 안다며 고개를 끄덕이기에 쿠로오는 왠지 모를 불안감을 품고 어떻게 아는데? 하고 답문하곤 했었다. 그럼 그 쉴새없이 종알대는 시끄러운 녀석은, 당연하게도 '그야 네가 금방이라도 미칠 것 같은 야한 표정하고 울상을 지으니까. 게다가 아래도 바로 조이고...' 하는 둥의 음담패설을 실컷 쏟아내는 것이다. 바로 그 입을 막긴 했으나 이미 들어버린 질 나쁜 진심들에 쿠로오는 어쩔 수 없이 울며 겨자먹기로 동의했다. 인정할 수 밖에 없지, 뭐.
어쩌다 이런 곳에 성감대가 있는지는 스스로도 알 수 없었다. 당연한 것 아냐? 나도 이해 안돼. 혼자서 양손으로 손가락을 겹치고, 여기가 왜 그렇게 민감한지 이해해보겠다는 듯 살살 쓸면 결국 온통 붉어진 눈가로 손을 풀고 양팔에 오른 소름을 가라앉히려 팔을 벅벅 쓸어내렸다. 배구하는 남자인 쿠로오의 손은 굳은살이 가득했다. 이런 여리지도 않은 살이 왜 그럴까. 그저 미칠 노릇이다. 보쿠토가 뱉어내는 음담패설처럼, 쿠로오는 손가락 사이를 진득하게 문지르면 거의 자지러졌다. 아예 견디지를 못하는 것이다. 네가 여기로 느껴봐야한다는 말은 요새 쿠로오가 가장 자주 달고사는 소리였다. 네가 모르니까 이러는 거지? 쿠로오가 종종 불만을 토하듯이 보쿠토는 야하기 짝이 없는 애인의 반응에 대한 충족감 반, 이런 곳을 느끼면 얼마나 느낀다고 라는 식의 의아함 반으로 손을 일단 잡으면 놓아주질 않았다. 호기심이 돋쳤는지 아예 손목을 딱 붙잡고 깍지를 낀 뒤 그 크고 두꺼운 손가락으로 비비듯 만져대는 통에 쿠로오는 그날 밤 날이 하얗게 새도록 울어야했다.
진짜 너, 짜증나. 쌍방으로 몸을 섞기 시작한 후로 본 적 없던 섹스 후 정신까지 탈진해버린 애인의 모습이 보쿠토는 성격 나쁘게도 아주 마음에 들었다.
원점으로 돌아와서, 보쿠토 코타로는 현재 쿠로오 테츠로의 약점을 잡아 아주 잘 먹고 잘 살고 있습니다.
어느 과인지도 모를 그 여자애가 다녀간 이후, 폭풍처럼 삐져버린 보쿠토가 아주 낯선 건 아니었다. 은근히 속이 좁고 툴툴대길 잘하는 아이같은 면모가 있다는 건 고교 시절부터 너무나도 유명한 사실이었기 때문이다. 이럴 때면 아카아시 케이지의 과업을 물려받은 것 같다며 쿠로오는 피곤한 연인을 달래는 데에 전력을 다했었다. 그런데, 한달 전부터 그 구도가 좀 바뀌었다고 해야할까. 쿠로오는 저 앞 강단에 선 교수님의 안경테가 동그란지 네모난지도 분간할 수가 없는 상태였다. 책상 아래로 맞잡은 손과, 터질 듯 뜨거운 귀로 모자라 화끈대는 얼굴에 제 정신을 잡기조차 어려웠다. 한달 전의 그 밤부터, 보쿠토는 쿠로오의 손을 붙들고 만져대지 좀 말라는 그의 발악을 싸그리 무시한 채 손가락 만으로 가버리는 부끄럽기 짝이 없는 모습을 최소 열세번은 목격했음에도 아직 깨달은 바가 없는 듯했다. 손깍지를 끼면 바로 다리가 풀리는 정직한 몸에 그렇게 만족스러워 했으면서, 여자애에게 무심코 뱉은 제 얘기에 멋대로 질투한 심술의 표출로 '같은 강의를 듣는 시간 동안 손 잡게 해줘!' 따위 허무맹랑한 요구를 해놓고 아예 잊은 듯 딴 세상에 산다.
대학 강의는 잠깐 정신을 놓으면 진도가 저 앞을 달리곤 한다. 그리고 대학생이 너 하나만은 아닐텐데, 코타로. 쿠로오는 제 앞에 놓인 거의 백지상태인 교재 상황에 한숨을 쉬었다. 오늘 강의는 완전히 종쳤다. 보쿠토 녀석은 십 분쯤 전부터 이쪽은 아예보지 않고 있지만, 반은 강의를 들어도 반은 제 손을 만지는 데 여념이 없기에 쟤도 지금 제대로 집중하지 않고 있다는 게 분명했다.
결국 허무맹랑한 제의를 수락한 건 쿠로오였다. 보쿠토 녀석이 토라지기 시작하면 그걸 받아주는 상대가 얼마나 지쳐야 하는 지를 아카아시 케이지를 통해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기에 울상을 지으면서도 맨 뒷자리를 골라 잡아 책상 아래로 손을 내밀었던 것이다. 결국 고의성 짙게 꾹꾹 누르고 은근히 비벼오는 손길에 입술을 꽉 깨물고 헛숨을 참은 게 벌써 이십분이다. 제 손도 그렇지만 스파이커라서 더 그런지 가득인 굳은살에 긁혀 신음하느라 정신력의 소모가 크다. 이미 힘이 다 빠져 너덜너덜한 제 상태를 아는지 모르는지, 큰 소리를 내면 재미를 붙일까봐 죽기 살기로 소리를 참았더니 다른 생각에 빠져버린 바보 부엉이다.
허공인지 교수님인지 칠판인지 모를 곳에 시선을 고정하고 멍하게 입을 벌린 채 쿠로오의 손을 만지작대는 보쿠토는 아마 3.5차원 쯤을 여행중이신 듯 하다. 방심한 차에 손톱에 찔려 흑, 하는 비명을 간신히 삼켜낸 쿠로오가 보기에는 속이 뒤집어지는 태도다. 옆에서 끙끙대는 누구는 눈에도 안보인다 이거지, 그렇다고 '나 지금 너무 느끼니까 그만 만져줘.' 따위의 정신나갈 소리를 지껄이기는 죽어도 싫은 쿠로오였다.
"힉, 아... 큼."
미치겠네. 쿠로오는 잡히지 않은 다른 손으로 입을 가렸다가 머리칼을 헝클이는 둥 안절부절 못하고 있었다. 내 자존심과, 서기 직전인 아들 사이에서 고민중인 제 처지가 한심하고, 부끄러운 게... 아, 죽고 싶다.
결국 쿠로오는 자존심을 박살내며 스파이커 애인의 손을 꽉 잡아 쥐었다.
"집에... 집에 가서 만지게 해줄테니까."
5월 14일, 쿠로오 테츠로. 제 허리의 건강상태와 이별을 고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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