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에쿠로] 아군 와해 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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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 7. 12. 17:43
* <The Purgy> 기반의 픽션입니다.
12시간으로 제한되는 일년치 악행의 집행은 잔인하고, 생생하며, 누구에게나 해당된다.
알립니다.
지금부터 12시간 동안,
살인 포함 모든 범죄가 합법입니다.
범죄율 1%를 위해
모두 동참해주십시오.
사람이 하루만에 변하지는 않는다. 저들은 원래 저 만큼의 사람이었으며, 단지 그 밑바닥을 드러낸 것 뿐이다. 쿠로오는 아침 이슬에 섞여 올라오는 피비린내에 진저리를 쳤다. 하다못해 담벼락의 벽돌 틈새에도 혈향이 깊이 배어 묘하게 비렸다. 현재 미국은 놀랄만큼 저조한 범죄율을 보이고 있었지만 그 대가는 잔인하다. 법률의 강화인지 약화인지 모를 개정안이 통과된 후로 이 도시는 놀랄만큼 안전해졌다. 원인은 퍼지 데이(Purgy Day). 열두시간 동안 사람들은 자신들을 통제하던 모든 규제에서 자유로워진다. 어떠한 범죄행위도 반나절의 틀 안에서 허용되면, 그들은 서로를 물어뜯어 죽고 죽이며 더한 짓도 하는 것을 서슴지 않는 것이다.
한블록 건너에 살던 제인이 죽었다. 민간인이라고 하기엔 빼어난 외모를 가지고 있던 그녀는 이미 6년 전 퍼지데이에 침입한 괴한들에게 강간당한 전력이 있어 올해도 많은 걱정을 떠안고 저주받은 하루를 준비해야 했다고 한다. 궁여지책으로 찾아간 남자친구는 문앞에 나무판자를 못박고 완벽하게 그녀를 은폐했으나 정작 본인이 제인을 해칠 살인자가 될 줄은 몰랐던 모양이다. 믿고 찾아가 의지한 상대에게 한번 더 같은 양상으로 강간당할 위기에 처하자 반항하던 그녀는 우발적으로 살해당했고, 고의적 살인마저 합리화 시켜버리는 퍼지데이의 원칙에 따라 아무도 그에게 그녀의 죽음에 대한 책임을 묻지 않는다. 작은 도시지만 꽤 붐비던 거리는 완전히 한산했고, 대신에 깨진 유리조각이나 핏자국, 엉망진창으로 널브러진 쓰레기들이 듬성듬성 즐비했다. 웬만한 객기가 아니고서야 무질서에 고스란히 노출되는 것을 즐기는 사람이 없는 만큼 휑한 거리에 짜증을 부리며 아무거나 때려 부순 불한당들의 소행이다.
일본인인 쿠로오가 이 도시에 온 것도 몇년째였다. 익숙한 다음날 아침의 풍경에 질색을 하며 뒷정리를 시작하면, 그제서야 얼어붙었던 마을에 서서히 혈색이 돌며 느릿한 움직임이 시작된다. 주차되어 있던 차 두 대가 완전히 박살이 나, 치워내려면 그 혼자로는 어림도 없었다. 곧 그를 발견하고 도와주겠다며 다가온 샘에게 쿠로오는 '네가 어젯밤 들고 가던 쇠파이프가 멋지더라'고 말하지 않는다. 맞은편에서 떨어져나온 보닛을 함께 들어주는 데에 멋쩍은 눈 인사로 짧게 감사의 표시를 하며, 통제의 밖에서 마주한 인간의 바닥과 그 추악함을 묵인하는 것이다. 비단 일년 후 그 쇠파이프의 새로운 표적이 되고싶지 않아서만은 아니다. 보닛은 둘이 들기에도 무거워서, 지나가던 이름 모를 마을 주민 하나가 더 가세해서야 치워낼 수 있었다. 견인차를 불렀다고 말하자, 샘은 수고했다며 반대편으로 사라졌다.
무리지어 몰려다니는 불량배들의 깔깔거림과 그들이 닥치는 대로 때려부수는 소리, 누군가의 비명소리. 잡배들은 무리끼리 부딪히면 어느 한쪽을 모조리 잡아야 직성이 풀리는 듯 했다. 하루 종일, 아침부터 밤까지. 시끄럽게 째지던 무질서가 멎자 아침의 공기는 싸늘하게 가라앉은 정적의 연속이었다.
그리고 그 한가운데에 네가 있었고.
"아직은 위험할지도 모르니까 집에 들어가라."
"나, 열두시부터 여기에 있었는데여!"
"용케 목숨은 붙어 있네."
"아직 어린애니까?"
마냥 어린애는 아닌 것 같은데 말이야. 그땐 몰랐지만, 퍼지데이가 채 끝나기 전부터 도로 한복판, 똑같은 곳에서 날 밝기를 기다리던 이상한 꼬마애의 이름이 하이바 리에프였다. 그날 그 애가 집에서 도망쳐나올 수 밖에 없던 이유는 아마 같은 날 집에서 수습된 어머니와 아버지의 시체 때문일 것이다. 열 한살 쯤 되었을까. 어려서 죽진 않았다며 꽤 개구지게 웃던 그 얼굴을 기억한다─마냥 어린 애는 아닌 것 같은데 말이야, 그러게요.
"우리집 문이라도 두드려보지 그랬어?"
국적은 일본이지만 쿠로오는 열세살 때부터 미국에 살았다. 그의 조부는 도시 외곽의 작은 마을에서 서점을 운영했는데, 어린 쿠로오는 그 시간을 등에 업은 낡은 책들의 종잇장 한 장 한 장에서 배어나오는 먼지향을 언뜻 사랑하곤 했다. 퍼지데이라는 이름 하에 가득 들어찬 책들의 종이 내음 보다도 마을의 피비린내가 짙어진 것은 어린 그에게 꽤 가혹했으리라. 그의 조부와 함께 할 수 있었던 건 약 오년 남짓이었다. 열여덟 살의 퍼지데이에 그는 세상을 떴고, 쿠로오는 대신 헌책방을 물려받는다.
아무것도 모르는 나이에 무질서에 대한 경멸을 품어야 했던 기분이란.
법률상 퍼지데이에도 은행은 털 수 없다. 보통 주로 타겟이 되는 것은 슈퍼마켓이나 보석상 등의 가게나 돈이 많은 집이 되었다. 헌책방처럼 값도 나가지 않고 무겁기만 한 것들로 가득한 곳은 시시했기에 쿠로오가 십년이 넘도록 퍼지데이에 큰 일 한번 없이 조용히 넘어갈 수 있었던 것도 아주 이해가 안되는 일은 아니다. 어린 쿠로오에게 조부가 가르쳐준 도피법은 단순히 대문을 걸어잠그고,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었다. 불도 켜지 않고, 움직임은 최소화하며 숨을 죽인다. 소리도 그림자도 새어나가지 않도록 하며 아무도 모를 지하실에 웅크리고 반나절을 참으면 일년의 무사가 보장되는 것이다. 책장의 종이 결에 달라붙길 좋아하는 먼지마저 침묵하면 지루한 헌책방에 관심을 가지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굳이 대문에 튼튼한 철제 자물쇠를 걸어잠그고도 안심을 못해 나무판자까지 못박을 필요또한 그랬다.
─연례 '퍼지'의 시작을 알립니다. 사이렌이 울리면 모든 범죄가 12시간 동안 허용되며, 긴급구호 서비스는 정지됩니다.
범죄동기나 원인이라는 게 실낱보다 옅은 살인이 허용되는 무질서를 정부는 매년 방관해왔고, 쿠로오 테츠로가 그 방조를 혐오한 건 이미 열여덟, 헌책방을 물려받았던 그 해 부터였다. 사이렌이 울리면 겁에 질린 자들은 그늘 속으로 숨어들고, 도망치지 못한 자들은 반강제적으로 혼란의 도가니에 뛰어들어 함께 달려야한다. 조금이라도 멈춘다면 죽어버릴지도 모르니까. 어느덧 스물 다섯이 된 쿠로오는 조용히 닫혀있던 헌책방의 침묵을 잠궜다.
쾅, 쾅.
곧 사이렌이 울릴텐데. 아직 숨을 곳을 찾지 못한 자들이 가까운 문을 두드리는 것도 년마다 있는 일이다. 하나부터 열까지 지긋지긋하지 않은 게 없다며, 쿠로오는 벽에 기대 불청객의 동태를 살폈다.
믿을 사람은 하나도 없다, 열여덟의 쿠로오는 일찍이 그걸 알고 있었다. 그의 조부는 괴한의 침입이 있을지도 모르니 같이 있자며 찾아왔던 옆집 사람에 의해 살해당했다. 늘 저녁시간이면 제 할아버지와 함께 이야기나 나누며 체스를 두던 사람이었는데, 그 자식이 '빌어먹을 인종차별주의자라는 건 오 년이 지나 더러운 동양인'이라며 산탄총으로 조부의 머리를 날려버리는 장면을 목격하지 못했더라면 평생 알 수 없었을 것이다. 사람이 하루만에 변하지는 않는다. 그들은 원래 그렇게 추하고, 더러운 족속인 거다. 노크가 이어지다가 잠긴 문고리를 덜걱대고 있었지만 쿠로오는 거리에 방치되어 살인 행렬에 노출될 민간인에 대한 동정심이 들지 않았다.
"아, 젠장. 안에 없어여?"
"열려있었던 거 아는데. 쿠로상!"
그 때, 내가 지하실에 숨어있지 않았더라면? 쿠로오는 여전히 일본어를 할 수 있었다. 차별받는 동양인은 어떤 양상이든 불합리하지만, 그 대가가 친족의 죽음이었을 경우엔 몇배로 혐오스러운 법이다. 그 날 이후 쿠로오는 이웃의 누구와도 이야기를 나누지 않아서, 몇 년동안 엎치락 뒤치락 바뀌어 온 마을의 누군가가 그의 이름을 아는 것은 드문 일일텐데도 불청객은 마치 그 이름을 몇번이고 되풀이해본 것 마냥 익숙하게 입에 담았다.
"언젠 문이라도 두드려 보라면서여, 그 땐 어려서 귀엽기라도 했지 저 이제 백구십인데. 가만 두다간 맥도 못추리고 문 앞에 시체 치울 걸요? 너무하시네."
문득 스쳐간 기억 속에 어린 남자애가 쓰러진 표지판 위에 걸터앉아 있었다. 저 멀리서 집 하나가 통째로 불탔는데, 붙은 불이 꺼지지도 않은 채 굴러온 나무 판자 옆에서 아무렇지 않게 또랑또랑 맑은 눈을 하고 있던 은발 머리 남자애. 비명소리가 들리고 잿가루 냄새가 났다. 초록색 벽안이 기억에 또렷하게 남는다. 남자가 비치는 인터폰 화면은 흑백이었지만 그 눈이 초록색일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쿠로오가 홀린 듯 문을 열었다.
서점이라 하나 쿠로오가 신간을 들여오는 경우는 아주 적었다. 풍경을 달아두고 문은 닫아둔다, 그러면 보통 작은 방울종이 울리는 것은 하루에 열번이 채 되지 않았다. 시간을 지새우는 것을 함께하다보면 책들과 함께 침잠하는 것 마저 특별해진다. 쿠로오는 새 책이라고는 찾아보기 어려운 제 서점을 사랑했다. 매년 퍼지데이가 되면 이 사랑스러운 서점은 제가 숨쉬는 곳에서 도망치는 곳으로 변질되곤 했는데, 쿠로오가 그 하루를 싫어하는 이유 중 하나가 여기에 있었다. 문고리를 돌려 잠글 때 비로소 밖과 단절되는 느낌과, 죄악이 스며들지 않길 바라며 불안함으로 자물쇠를 한번 더 확인하는 느낌 사이의 괴리감이 강조되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는 까닭이다. 그럼에도 헌책방은 가장 소소해서 가장 안전하게 그의 도피처가 되어주곤 했는데, 일곱 해 전 그 날 이후 이 도피처에 제 삼자를 들인 적은 단 한번도 없었다.
"이렇게만 잠그면 돼여? 이게 끝?"
그리고 쿠로오 테츠로는 그 불문율을 깬 과거의 자신을 원망하고 있었다.
아무거나 만지지 마. 대강, 그러나 날카롭고 단단히 주의를 주고는 자물쇠를 확인한다. 몇개 없는 잠금잠치를 모두 걸어 잠그고 창문 또한 한번씩 확인한 뒤 커튼을 닫으면 그게 언제나 그래왔던 준비의 전부다. 쿠로오는 여전히 자신이 낯선 남자에게 문을 열어 준 이유를 알지 못했다. 그저 이름을 물어보고, 하이바 리에프라는 답을 얻었을 뿐이다.
이게 다에요? 그는 자꾸만 그렇게 물었다.
그럼 뭐가 더 필요한데? 서점 안쪽으로 들어가면 작게 딸린 부엌에 자리를 잡으며 콜라를 따라 내민다. 입구에서 멀고, 창도 아주 작은 것 하나 뿐이다. 그마저도 커튼은 암적색이었다. 쿠로오는 주머니에 손을 넣고 미지근하게 데워진 작은 열쇠를 만지작대며 콜라를 훌쩍일 뿐 말이 없었다. 그의 조부는 마루 틈새에 교묘하게 감춰진 지하실 문을 열어 쿠로오를 들여보내고 자신은 항상 부엌에 앉아 촛불을 약하게 켜두고 신문을 읽었는데, 빌어먹을 손님이 오던 그 날도 예외가 아니었다. 만약 조부가 '혹여나의 상황에 대비한다'며 산탄총을 지참한 이웃이 방문했다는 이유로 지하실이 아닌 부엌을 손자의 대피처로 선택했었다면, 쿠로오 또한 그 무지막지한 산탄총에 두개골이 박살나지 않았으리라는 보장은 없는 것이다. 쿠로오는 주머니 깊이 열쇠를 밀어넣었다. 아무튼 제 3자에게 보이는 일은 결코 없어야 할 일이라는 건 이미 칠 년 전 증명 된 일이다. 얼떨결이지만, 그는 이번 퍼지데이를 꼼짝없이 혹시 모를 이웃 하나와 부엌 테이블에 마주 앉아 보낼 운명에 처해있었다. 그리고 이 상황이 아주 엿같다는 생각에 변함은 없다.
"하지만, 너무 허술하잖아요. 총은 하나도 없어여?"
"너 같은 애들이 내 머리를 날려버릴 걸 대비하면 역시 하나 꺼내는 게 나으려나."
"제가 쿠로상을 쏜다구여?"
"너 내이름은 어떻게 아는 거야?"
하이바 리에프가 어쩐지 제 눈치를 보고있다는 게 너무나도 여실히 느껴진 탓에 슬슬 가벼운 짜증이 치미려던 참이었다. 지나칠 정도로 이쪽을 살피는 게 너무나도 노골적이었다. 리에프는 쿠로오가 지나가듯 던진 시선에 얼른 손을 허리의 권총에서 멀찍이 떨어트렸다. 그러고는 똘망똘망한 눈을 하며 완전히 엉뚱한 말을 들었다는 듯, 제가여? 하고 묻는 것이다. 쿠로오는 다 들리도록 콧방귀를 뀐다. 내가 여기서 저거, 집어들면 넌 날 쏠 거잖아. 턱짓으로 대리석 탁자 저쪽 끝의 식칼 꽂이를 가리키며. 권총에서 제일 멀리 떨어트리려 어중간하게 허공을 휘적이던 리에프가 갈 곳을 잃었던 양손을 결국 목 뒤로 모아 깍지를 낀다. 좀처럼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기 힘든 표정이다. 종잡을 수 없다기 보다는,
"오, 괜찮네여."
사실 생각이 없는 쪽에 가까워 보이긴 하다만.
"저거라도 들고 있는 게 낫겠어여. 누가 들어오면 어떡해?"
"오면? 찌르기라도 하라고?"
"그럼요? 당장 내 목이 따이게 생겼는데 안 찔러여?"
딱히 널 들이지만 않았어도 목이 따이게 생길 상황은 안왔을걸. 쿠로오는 굳이 불편함을 숨기지 않는다. 불쾌함이 뚝뚝 묻어나는 목소리가 공기를 찢으며 울리는 사이렌 소리에 덮였다. 리에프는 제 청각이 얼마나 예민한 줄 아냐며 귀를 틀어막고, 쿠로오는 지하실 밖의 부엌에서 한 겹 줄어든 완충을 거쳐 집 안을 울리는 경고음의 데시벨에 인상을 구겼다.
낯선 이와 함께하는 퍼지데이의 시작이었다. 문득 상황이 적과의 동침이나, 뭐 대충 그런 것과 겹쳐보여 쿠로오는 미지근하게 식은 주제에 혀가 아릴 정도로 탄산이 끓는 콜라를 목구멍에 부어 넘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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