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에쿠로/커미션] 선호 비례적 편식
HQ
2016. 5. 4. 13:08
하이바 리에프 X 쿠로오 테츠로
* 뱀파이어 AU
** ㅂㄴ님 커미션입니다.
세상에 넘치는 준비가 안된 어른들이 포장한 그들의 성숙함은 수많은 판타지적 요소로 밑바닥을 까발려지곤 한다. 세상은 그렇게 알록달록한 알사탕마냥 예쁘고 달콤하며, 둥글지 않다는 걸 알면서도 판타지에 기대곤 하는 '알 만한 사람들'은 세상에 꽤 많다.
물론 거기에 쿠로오 테츠로는 포함되어 있지 않았다. 성년을 맞으려면 일 년의 반 정도가 조금 못 되게 남은 탓도 있지만, 신체 건장한 고교 삼학년 남학생으로서 동화나 판타지 소설을 가까이한다는 것 자체가 조금 넌센스한 탓이다. 실제로 쿠로오는 늘어선 DVD 앞에서는 주저없이 SF를 골라 들면서도, 비과학적인 미신에 대한 신뢰는 일체 보이지 않는 이 시대의 평범하고도 퍽퍽한 남학생일 뿐이었다.
원래 예기치 못한 일들을 예기치 못하는 이유는 대상을 골라가며 발생하는 게 아니라는 것 때문이라지만, 종종 인터넷에 떠도는 판타지 소설의 진부하고도 스테디한 클리셰일 뿐인 뱀파이어와 쿠로오 테츠로는 조금 심각하게 어울리지 않는다. 과학적 인간은 아니라도 비상식적 이론에 시간을 쏟지 않는 쿠로오가 이제는 공상소설 밖에서는 찾아보기도 힘든 뱀파이어라는 오래된 설정과 직접적으로 엮여버린 것이 이미 몇달이 된 이야기라도 그건 정말이지 예기치 못한 일이 아닐 수 없는 것이다.
진짜 많이 먹네. 빈 그릇을 앞에 두고 질린 듯이 바라보는 쿠로오를 아는지 모르는지 하이바 리에프는 조그마한 밥공기가 아닌 대접에 퍼 준 쌀밥과 카레라이스의 마지막 한 입을 깔끔히 비워내는 중이었다.
"다 들어가냐?"
"당연하져, 사실 더 먹으면 쿠로상 지갑 거덜날까봐."
"징그러운 놈."
말은 그렇게 해도 그 많은 양이 어디로 들어가는 지 쿠로오가 모를 리 없었다. '굶은 것도 아닌데 저걸 다 먹어'가 아닌 '그렇게 굶는데 저거라도 다 먹어야지'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물론 꼬박 여섯 시간 전에도 저 만큼을 먹어치우는 꼴을 그대로 관전한 바 있는데도 꽤나 관대한 처사다.
그러니까, 하이바 리에프는 뱀파이어였다.
공상 소설 밖에도 판타지가 존재한다. 쿠로오는 판타지 소설에 밤 새우는 여자애들과는 거리가 멀다 못해 연관성이 아주 없는 쪽이었지만 멋모르는 이종족이 예기치 못하게 불쑥 끼어든 건 어찌 되었건 쿠로오의 인생이었다. 세상에 요즘 세상에 뱀파이어가 어디 있느냐고 묻는다면 쿠로오의 대답은 하나다. 그러게 말이다. 쿠로오는 아직도 어쩌다 이렇게 되었는지는 몰라도 쿠로오의 자취방에 눌러앉은 이 철없는 뱀파이어가 실은 쿠로오보다 몇천년을 더 살았으며, 사람의 목 피부 아래 맥박이 뛰는 곳을 골라 무자비하게 물어뜯는다는 사실에 건조한 의심을 품곤 했다. 몇번이고 굶주림에 허덕이는 그에게 손목부터 목덜미를 내어주었음에도 불구하고 쟤가 진짜 뱀파이어일까, 따위의 무의미한 것들을 자문한다. 답은 여전히 정말 믿고싶지 않다 정도가 나오곤 했지만, 결국 뱀파이어는 진짜 있었다. 그것도 내 아주 가까운 곳에.
현대에는 쿠로오만큼, 혹은 그보다 몇 수저를 더 뜨며 과학을 맹신하는 부류가 많았다. 목에 잇자국을 닮은 구멍 두개와 혈액 부족으로 죽어버린 시체가 발견되어도 섣불리 '이건 뱀파이어의 소행'따위의 헛소리를 뱉을 사람은 없다. 리에프에게 있어서는 실로 딱딱하고 황량하기 짝이 없을 수밖에 없는 사회다. 가뭄 든 딱딱한 땅에서 잘 자라는 나무가 없듯이, 네모진 빌딩으로 가득 찬 딱딱한 세상에서 어리지도 않은 이 뱀파이어의 삶은 꽤 힘들었다.
"오늘도 굶었냐."
"엣, 나가지도 않았는데?"
"자랑이지?"
아니여. 눈치를 살살 보는 리에프를 다시 보니 정말 나가지도 않았는지 옷차림이 그대로다. 얘가 순한 건지 능력이 없는 건지, 흡혈량이 부족하면 제대로 정신도 못차리는 주제에 어쩌려고 사냥의 '사' 자도 시작하지 않는 건지 그저 궁금하다.
리에프는 그러고 보면 제 앞에서 새빨갛게 물드는 눈동자나, 날카롭게 살갗을 찢어놓는 이빨 따위를 보여주는 것을 싫어했다. 그 중에서도 가장 꺼리는 것은 역시 피를 뒤집어 쓴 식이의 흔적. 입가며 목에 새빨갛게 피가 튄 모습은 분명 괴기스럽기 짝이 없었지만 실은 아무렇지 않게 볼 수 있는데도, 그는 그렇게 하길 바라지 않는다. 네가 날 죽이지 않을 거니까 괜찮아. 그 모습을 똑바로 바라보기까지 꽤나 긴 시간이 걸렸지만 지금은 괜찮은데. 리에프는 그렇지 않은 모양이다.
뱀파이어에게 아껴줄 대상이나 혹은 그런 종류의 어떤 위치에 올랐다는 것은 분명 흔한 일이 아니다. 어쩌다 그를 제 집에 들였는지는 기억도 나지 않지만, 어쨌든 진부하게 비가 내리는 날 피에 굶주린 그를 구했다 정도의 시나리오는 아니었다. 뱀파이어라는 존재 자체로 평범함과는 거리가 먼 그는, 아주 평범하게 제 삶에 녹아들었다.
덕분에 쿠로오는 평범하지만은 않은 평범한 삶 위를 걷고 있다. 가끔 문을 열면 피 비린내가 훅 풍겨 혹 이웃이 의심할까 얼른 현관문을 닫고, 욕실까지 이어진 피에 젖은 발자국의 주인이 눈치를 보며 문을 열 때까지 기다렸다가 짐짓 엄하게 청소를 요구하는 날들이 이어졌지만, 쿠로오는 어느덧 익숙하게 받아들이고 있었다.
거실에서 죽어가는 여자를 끌어안고 우드득, 살을 씹는 소리와 함께 그 목에 코를 박고있던 그를 목격한 건 딱 한번이었다.
"별로 쿠로상한테 그런 거 보여주고 싶지 않아여."
"그것 참 고맙네. 비명 지르면서 도망을 갈 걸 그랬나."
"반응도 너무했던 건 맞지만 그거 말고."
그럼 뭔데? 쿠로오는 삐딱한 웃음으로 질문을 대체했다. 뱀파이어가 인간에게 식사를 보이고 싶어하지 않는 이유를 내가 알아서 뭐하겠어.
언제라도 제 목을 물어뜯을 준비가 된 리에프와 같은 공간에서 생활하면서, 자다 깨 팬티바람으로 돌아다녀도 안전이 보장된다는 건 꽤 고마운 일이다. 물론 지금처럼 그의 안색이 창백할 때는 자제한다. 믿지 못해서가 아니라 그게 꽤 잔인한 일이라는 걸 알기 때문에. 이 뱀파이어와 인간의 기묘한 유대관계에서 어쩐지 쿠로오는 위를 차지하고 있었다.
그래도,
"얼마나 굶었어?"
"비밀인데! 쿠로상 저에 대해 너무 많은 걸 알려고..., 이, 일주일은 안 됐을 걸."
짐짓 발랄하게 어물쩍 넘기려드는 이 뱀파이어는 몇천년을 살았다는데도 참 요령이 없다. 한심하다는 듯한 눈초리에 금세 꼬리를 말고 이실직고. 이럴 거면 빼긴 왜 뺐냐. 일주일이 안됐긴, 마지막으로 피냄새에 절어 들어온 게 꼬박 저번주다. 날 일곱 개는 채우고도 남았던 것이다.
솔직히 말해봐, 배고프지?
부엌은 정리 전인지라, 리에프가 하루 만에 먹어치운 사흘치 카레 준비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있었다. 눈치는 없는 주제에 감은 좋아서 헤실대던 표정을 굳히고 눈동자나 굴리며 고개를 도리도리 젓는 리에프를 뒤로하고 쿠로오는 당근이며 감자를 토막내던 식칼을 쥐었다. 꽤나 흉흉한 도구 선택이지만 어쩔 수 없지 뭐.
뱀파이어의 본능이 비명을 지른다. 아, 맙소사.
단단한 생감자도 무난히 자르는 칼날은 뱀파이어의 송곳니와 별반 다르지 않게 날카로웠다. 쿠로오는 망설임 없이 제 검지를 깊게 베었다.
실은 일주일을 굶었다. 리에프는 그렇게 보이지 않아도 꽤 본능적인 뱀파이어다. 아주 옛날, 몇달도 전에. 본능을 이기지 못하고 여자 하날 이 집으로 끌어들여 목을 씹고 핏줄을 찢었다. 말랑한 살은 두부나 다름 없었고, 피가 어디로 튀든 고려대상이 아니었다. 채 숨이 떨어지지 않은 그녀의 얼굴에서 핏기가 가실수록 정신은 말짱했다. 마지막 순간 고개를 들었을 때 마주한 건 굳어버린 쿠로오 테츠로였다.
피가 뚝뚝 흐르는 검지를 앞으로 내밀면 리에프는 어떤 사양도 없이 그 손가락을 덥석 문다. 이미 식탁에 떨어진 몇방울 새빨간 선혈 조차 마른 사막에 엎지른 생명수나 다름없었다. 뱀파이어는 체온도 낮은 주제에 입 안은 뜨겁다고 생각했다. 혓바닥으로 손가락을 감싸고 느릿느릿 빨아댄다. 깔끔하게도 찢어진 상처를 벌리지 않도록 하는 이성과, 감질나게 배어나는 선혈에 애가 닳아 엉망으로 헤집고 싶어하는 본능. 꽤나 절박한 표정으로 질척하게 핥아대는 게, 조용한 집 안에 울리는 젖은 소리가. 외설스럽다.
꽤나 깊게 베었을까, 피가 쉽게 멎을 생각을 않는 손가락을 빼면 리에프는 애가 닳아 그 손끝을 쫓는다. 마침내 타액으로 번들번들 빛나도록 젖은 손을 뒤로 물리면, 리에프는 이미 붉게 물들어 욕망을 뚝뚝 떨어트리는 중이다.
"리에프."
쿠로오의 목소리는 여전히 무미건조했다. 그런 주제에피는 지나치게 짙어 붉다못해 검다. 티셔츠를 옆으로 끌어 목덜미를 훤히 드러내더니 손끝에 진하게 들러붙은 제 피를 그 맥박 위에 문질러 닦았다.
"뭐 해?"
이미 그 시선은 못박힌 듯 떨어트릴 줄 모르고 있으면서. 쿠로오가 다시 한번 삐딱하게 웃었다. 쿠로상, 진짜 나쁘네여. 그거, 나한테 잔인한 거 알면서. 등이 부엌 벽에 닿는 순간 목이 날카롭게 꿰뚫린다. 부드러우면서도 어떠한 자비도 없이 파고드는 송곳니의 거대한 존재감에 낮은 탄식이 터진다. 쿠로오는 다른 무엇 대신 리에프의 허리께를 붙들었다. 아, 몸을 경직하면서도 끊어진 이성 앞에서 본능에 몸을 떠는 그를 끌어안는다.
나도 알아. 일그러져버린 얼굴을 어깨에 묻은 채 뜨거운 숨을 뱉었다. 죽이면 안되는 거 알지?
리에프가 굶주림에 도저히 버티지 못할 정도가 되면 쿠로오는 꼭 그가 없는 며칠을 보내야했다. 어딜 가는지 완전히 종적도 없이 사라져 소식이 뚝 끊기는 것이다. 비릿한 냄새를 가득 품고 나타나는 건 그로부터 일주일은 후였다. 그 이유를 물으면 리에프는 언제나 입을 닫았다. 쿠로오는 끈질기게 캐묻지는 않는다.
성격 나쁜 편인 거, 알죠?
뱀파이어보단 낫겠지.
그렇지 만은 아닌 것 같아요. 리에프는 가끔 쿠로오의 잔인함에 숨이 멎었다. 그 앞에서 목을 물어뜯지 않는 이유, 피 비린내를 떨치려 늘 찬 몸으로 귀가하는 이유, 실수로 낸 피에도 고개를 돌리고 입을 가리는 이유.
쿠로상 다 알고 있잖아.
욕망의 충족은 잔인하다. 굶주림에 허덕이던 가엾은 뱀파이어는 최상의 만찬 앞에서 가련하기 짝이 없었다.
"죽진 않았네."
"모르는 것도 아니면서 진짜 잔인해."
괜찮슴까? 정말? 눈에 띄게 창백해진 채 한다는 말이. 리에프는 제가 뱉을 수 있는 단어의 제한에 인상을 찌푸렸다. 쿠로오는 고개를 저으려다가 띵하고 울리는 골에 곧 생각을 접는다. 바보같긴.
넌 왜 모르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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