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쿠로] 연애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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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 5. 3. 12:43
* 커퀴 주의.
가끔 멍하게 이런 저런 생각 아래로 가라앉을 때나, 아직 잠에 취해 침대 매트리스에 푹 잠길 때. 그런 자신을 물 위로 끌어올려주는 것이 삭막한 현실이 아닌 연인의 입맞춤이라면 그보다 더 달콤하고 간지러운 핑크빛 연애사는 없을 것이다. 처음에는 낯간지러워 질색을 하고 표정을 우스꽝스럽게 일그러트리던 말캉한 입술의 감촉도 이제는 아무렇지 않게 이 쪽의 까칠한 입술로 되돌려 줄 정도로, 쿠로오 테츠로와 보쿠토 코타로가 그러한 분홍빛 연애 선상에서 꽃길을 걷는 중이었다.
끼리끼리가 아니라도 연습시합의 상대는 널렸지만 네코마와 후쿠로다니는 꼭 서로를 고집하곤 했다. 동문의 부원들만큼 어느 순간부터 친밀해진 양쪽 배구부 학생들에게 그 주장들이 서로 어깨를 나란히 하고 걷다가도 아무 생각없이 입술을 맞대는 사이가 되어 버렸다는 것은 처음에는 굉장한 충격이었다. 사실 상식적인 사람이라면 남자끼리 입을 맞추고 너무나 당당한 그들이 어이가 없는 것이 당연하지만, 아카아시 케이지는 그걸 두고 '보쿠토 상 이잖아요,' 라는 한마디로 일축했다. 이미 거기서 반쯤 납득당해버린 게 사실이지만, 그래도 그 둘이 보편적인 커플은 아니라는 것 또한 사실이다.
"그래도 쿠로오 씨는 의외네요. 장단 안맞춰주실 줄 알았는데."
아카아시의 말에 쿠로오가 그런가, 하는 표정으로 멀뚱히 서있자 보쿠토가 그 얼굴을 빤히 바라보더니 또 뺨에 입을 맞췄다. 지금 이 상황에 그러고 싶습니까, 대체. 아카아시와 그 뒤에서 숨 죽여 지켜보다가 못 볼 걸 봐버린 부원들의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딱히 안될 건 없잖아?"
쿠로오는 그렇게 말하곤 뿌듯한 표정의 보쿠토를 끌어 입술에 입을 맞추는 것으로 멋대로 상황을 종료해버린 뒤 '공 가지러 가자' 며 체육창고로 휙 떠나버렸다. 받은 건 뺨이었는데. 입술로 갚아주는 당당함에 얼빠진 부원들은 어쩔 수 없다는 식으로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비록 표정이 유쾌함과는 거리가 멀었지만 모두가 그들의 연애를 인정한 것은 그렇게 이루어진 강제적 납득에 의한 것이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상황이 그렇게 심각하진 않은 것 같았는데. 요즘 아카아시 케이지의 최대 고민은 합숙에서 곧 마주칠 신젠 고교와 우부가와 고교에게 두 주장들의 세상에 둘 뿐이라는 식의 세기말 연애사가 어떻게 보일까, 였다.
실은 모두가 그들을 인정한 건 거의 사분의 삼은 보쿠토 코타로 때문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도대체 어디서 뭘 할지 예상이 안되는 평소의 그를 아는 사람이라면 그 단순함과 경우없음을 아무렇지 않게 맞춰주는 쿠로오를 보고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일 것이다. 그래도,
"제발 경기 중엔 자중하시라니까요."
"웨─이. 오늘도 크로스가 안되시나 본데."
"지금 그걸 말하는 게,"
... 아니라구요. 다음엔 꼭 치겠다며 텐션을 높여 붕붕대는 보쿠토를 감당하지 못해 아카아시가 하던 말을 끊었다. 아니 대체 이 작자들은 생각이 있는 건지, 없는 건지. 보쿠토의 컨디션이 나쁜 건 아닌데 오늘은 유난히 쿠로오 쪽이 하이텐션이다. 날카로운 블록에 네댓번 멋지게 셧 아웃 당한 보쿠토의 표정이 꽤 볼 만 했던 것도 사실이라지만 철 없는 주장은 그 분위기에 홀랑 넘어가 놓고는 당당하기 짝이 없었다.
네트 앞에서 삐딱하게 웃으며 코타로 군, 오늘 왜 그래? 따위의 도발을 던져대는 쿠로오에게 네트 너머 그 멱살을 잡고 다짜고짜 입을 맞추고는 이 상태다. 뒤에서 얼이 빠졌던 코노하가 기어코 작게 욕설을 뱉었다. 네트 저편의 야쿠 모리스케의 기세나 그 옆에서 그 광경을 생중계로 똑똑히 지켜 봤음이 분명한 켄마의 표정도 장난이 아니다. 경기 중에 네트를 사이에 두고 입술을 부비는 상식 밖 행동을 저질러 놓고는 자기들만 태연한 게 여간 속이 끓는 게 아닌 것이다.
그 둘이 교제하기 시작한 것이 언제부터인지는 정확하게 밝혀지지 않았다. 어느 순간부터 자연스럽게 '친구'의 선을 넘다 못해 아주 부숴버린 둘이다. 그래놓고는 너무 당당해서 무슨 말도 못해 이 사단이 난 셈인데, 아무튼 두어 달이 채 되지 않은 것은 분명하다.
그런데도 둘은 이 세상의 연인이 서로 뿐이라는 것처럼 굴었다. 소위 말하면 죽고 못사는 닭살 커플의 정석인지도 모른다. 다른 한쪽이 말하는 걸 듣는 나머지 한쪽의 눈빛은 과거의 그를 아는 부원들이 보기에 낯설다 못해 소름이 끼쳤다.
으, 미친놈들. 요즘 부원들의 입에서 떨어질 줄 모르는 단어다.
가장 환장할 요소는 자각이 없다는 것이었다. 서로가 없으면 세상이 무너지는 것 마냥 사랑에 빠져 틈만 나면 버드 키스를 퍼붓는 주제에 그 자각이 없다. 그게 얼마나 답답한 건지는 적어도 아카아시나 양측 삼학년들에게는 물어보면 안된다. 얇게 자주 계속 쌓여온 스트레스가 터지면 괜히 분홍빛 연애질에 비관적이 되어, 엄한 곳에 화풀이를 할 가능성이 비약적으로 증가하기 마련이니까.
대충 설명하자면, 인생에서 배구를 빼면 남는 게 열개는 있을까 하는 놈들이 연습 시합 중인 것도 가리지 않는데 공공장소라던가 때와 장소 같은 걸 구별할 확률은 희박하다. 틈만 나면 시합 일정을 잡고 만나기만 하면 아무렇지 않게 뺨이며 손가락, 목덜미 따위에 입술을 붙였다. 그것도 어떤 의도나 생각이 전혀 담겨있지 않은 무의식적 이유로. 그래놓고, 걔가 그렇게 좋냐던가 하는 질문을 받으면 그 의도를 신생아의 손톱만큼도 이해하지 못한 채 '뭐가?'하고 되묻는 식이다.
분위기에 찬물도 아닌 얼음물을 사정없이 쏟아붓는 데 선수인 그 둘을 삼학년들은 종종 '한 쌍의 바퀴벌레'라고 불렀다.
팀의 주장 자리에서 거리낌없이 할 짓 못할 짓을 가리지 않는 둘에게 비난을 쪼아대는 건 주로 코노하나 타케토라, 야쿠의 몫이다. 그러면 뒤에서 차분하게 거드는 게 아카아시. 켄마는 말을 섞는 것 마저 매우 꺼리는 지경에 올랐으며 선배라 뭐라 말도 못하는 후배들은 늘 표정이 우스꽝스럽게 일그러졌다. 이상한 구도가 되어버렸다는 걸 온 몸으로 느끼는 게 일, 이학년들이라면 삼학년들은 대체 저 답없는 한 쌍 커플에 신경을 쏟느라 알지 못했고, 가장 생각이 없는 건 놀랍게도 당사자 둘이다. 제발 생각 좀 했으면.
"커플인 거 광고하냐? 왜 선이라는 걸 모르는데!"
"내가? 쿠로오, 네가 그랬어?"
"아니, 시끄럽고 이리와."
응! 하더니 쪼르르 쫓아가서 쪽, 하고는 또 공을 주워 창고로. 연습 시합 한 번이 이러니 주변인은 환장한다. 그 정도 눈치 없는 건 죄라고. 남겨진 코노하가 허공을 움켜쥐고 소리 없이 윽박질렀다. 아, 이 공허함이란.
*
내내 날카롭던 바람이 녹고 유해진 흐름에 꽃향기마저 섞이기 시작하는 계절이면 더위보다 훨씬 일찍 극성을 부리기 시작하는 건 커플들이다. 대체 쟤들은 왜 저러는지 모르겠어. 팔짱을 끼고 길을 걷다가도 한복판에서 서로 끌어안고 부비고. 길을 갈 생각이 있는 거냐며 질색하는 타케토라에게 정색하고 맞장구 치던 시절이 쿠로오에게도 있더랬다. 와, 커플 타도. 카라스노의 매니저만 보면 절로 무릎을 꿇는 주제에 연인들의 분홍빛 칠을 한 민폐에는 유난히 자비가 없다.
거기에 눈꼴 시리다는 이유로 동조한 쿠로오 테츠로는 어디에 누구였나.
그땐 자기도 같이 고개를 젓고, 별꼴이라는 듯 동조했으면서! 타케토라는 새삼 치미는 억울함에 눈물이라도 뽑아낼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되었다. 야마모토 타케토라는 이 순간 자신이 침착해야 함을 알았다. 이럴 땐 심호흡을 하고, 바보병이 옮지 않게... 벚꽃이 날리는 한복판에서 양 손으로 여자애의 볼을 감싸고 가벼운 버드키스를 콧등부터 입술까지 내려앉히던 그 커플의 ─본인 한정─ 로맨스를 목격했을 때, 쿠로오 테츠로가 했던 것처럼.
"못 본 척 하자."
외면하고 갈길 가기. 우리야 존나 부원이라 그 스케일부터 라인업까지 장난 없는 로맨스를 이해한다 쳐도 길 가던 사람들은 아니거든? 코즈메 켄마는 한시간을 스트레이트로 연습해도 실력이 그대로인 리에프의 리시브를 볼 때의 표정이었다. 얼굴이 창백해진 채 당장 가서 떼어 내겠다는 의지가 엿보이는 야쿠, 할 말을 잃은 이누오카. 눈을 가린 리에프까지. 타케토라는 부원들을 이끌고 찰싹 붙은 둘을 우회했다.
별로 이런 상황에 선배의 리더십 보이고 싶지 않다고! 그의 억울함을 아마 하늘은 알아주겠지.
쿠로오와 보쿠토는 대체 어느 포인트에서 불이 붙은 건지 길 위에서 한창 연애중이었다. 벚꽃이 피는 시기는 한참 지나서, 다 큰 남자 둘이 그러고 있는 거 파괴력 상당하다니까. 제발 주위 사람의 시선을 안중에 넣어주시겠습니까, 아카아시는 고개를 젓고 손으로 눈을 가리며 타케토라가 수습해 떠난 네코마 고교 배구부 일동을 따라 발길을 돌렸다.
몇달 전의 그 커플처럼. 쿠로오의 뺨을 감싸 쥔 채 질리지도 않고 뽀뽀 중인 둘은 아마 서로만이 존재하는 세상에서 사는 중인지,
"쿠로오, 뽀뽀할까?"
"지금 하고 있는 건 그럼 뭔데."
하며 하늘 아래 당당히 사랑중이다. 더 뭐라고 말해야 하는 건지, 실은 이 쯤되면 그냥 모든 것에 해탈하고 행복을 빌어주는 편이 낫다고들 믿는다.
대체 뽀뽀에 왜 그렇게 집착하는 건지 모르겠습니다, 그래도 행패는 행패. 사랑이라는 이름의 민폐를 온 몸으로 받아내는 중인 아카아시 케이지는 날로 늘어가는 고민 거리에 요즘 부쩍 늙는 듯 하다며 하소연했다. 뽀뽀 귀신이라도 들러붙은 것인지. 저 둘이 하는 걸 뽀뽀라고 부르는 건 어감이 너무 귀여우니 덜 귀여운 것으로 단어를 하나 더 만들어야 하는 것 아니냐는 의견까지 내놓는다. 어디에 붙여도 사랑스럽기만 한 뽀뽀라는 단어를 저 둘에게는 갖다대는 것 조차 용납하지 못하겠다는 의지다.
전생에 어떤 억울함을 떠안은 건지 그냥 얌전히 길을 걷다가도 문득 생각난 듯 팔을 당겨서, 아니면 목을 감아 당겨서, 혹은 제 쪽에서 숙여서. 손을 잡고 걷는다거나 팔짱을 끼는 것에는 통 관심이 없어 보이면서 뽀뽀에는 유난하니 실은 의문이 들 만도 하다.
퍼붓는 입술의 목적지 또한 다양했다. 가장 잦은 건 볼이었고, 그 다음이 입술. 누가 봐도 고교 삼학년에 거의 190cm에 육박하는 남학생끼리 입술을 붙일 곳은 아니지만 정말 신기할 정도로 전혀 신경쓰지 않는다. 손가락 마디 하나하나에 입을 맞추는 광경은 부원들에게 있어 막대한 항마력을 요구했다. 땀에 젖었든 막 뿌린 향수가 채 마르지 않았든 목덜미에 하는 뽀뽀에서는 그 노란 눈동자에서 욕망이 뚝뚝 떨어져 보는 이가 다 민망할 정도였고, 어깨나 머리칼, 눈, 콧등. 그냥 입술이 닿는 곳이면 틈 날 때마다 뽀뽀세례였다.
"어떻게 하면 그렇게 남의 눈을 신경쓰지 않을 수 있는 겁니까?"
"에... 내가 그래?"
아카아시는 눈치라고는 개미다리를 붙이려고 해도 못 쓸 만큼 가벼운 보쿠토를 하루 종일 옆에 끼고도 한결같은 쿠로오가 경이로울 지경이었다. 솔직히, 솔직히. 보쿠토 상이라면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선배는 뭘 하든 범상치는 않을 거라고, 뭐... 다들 그렇게 생각했는데.
쿠로오 씨도 그럴 줄은 몰랐죠.
*
"쿠로오, 나 좋아해?"
"에, 이제와서 자신 없는 걸까나. 매력 없다고."
"빨리!"
187.7cm. 삼센티가 조금 안되는 길이면 190cm에 육박하는 장신의 배구부 주장을 수용하기에 소파는 조금 짧은 감이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길게 누운 쿠로오의 발끝은 허공에서 까딱이는 중이다.
거기서 하나 더, 는 좀 무리가 아닐까 싶을 정도로 소파는 약간 위태롭다. 길게 누운 쿠로오의 배 위에 올라탄 보쿠토는 자신 또한 그 체격이 평균 사이즈는 웃돈다는 것을 좀 자각할 필요가 있었다.
좋아하냐니까.
확실히 보쿠토는 어린 아이같은 면이 있다. 없지 않아 있는 것도 아니고 넘치게 있다. 하지만 쿠로오는 부엉이를 닮아 동그라면서도 날카롭게 빛나는 눈이 자신을 똑바로 쳐다보는 이 순간을 꽤 좋아했다. 알고 싶어? 나른하게 물으며 씩 웃으면 곧바로 가감없이 아니, 그렇다는 대답 듣고싶어. 하는 보쿠토의 솔직함이 좋다.
"좋아합니다, 코타로 군. 그런데 나 지금 좀 힘든데."
이미 내려갈 생각은 없어보이지만. 쿠로오는 다시 쏟아지기 시작하는 보쿠토의 짧은 키스를 받아내다가, 별안간 그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아무도 없는데 굳이 짧게 할 필요는 없잖아?
─ 쿠로오 씨도 그럴 줄은 몰랐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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