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마우시] 열팽창이론

HQ

2016. 8. 8. 00:23

​* ㅍㄹ님 커미션입니다





한낮의 무더위는 악의가 다분하게도 뜨겁게 내리꽂힌다. 건조하고도 따가운 뙤약볕에 상반되게 공기가 눅눅했다. 여하튼 유쾌하지 않은 날씨다. 야마구치 타다시가 검은 탓에 잔뜩 뜨겁게 달아올라 버린 핸드폰 액정을 한참 들여다보다가 이내 소심하게 입을 삐죽였다. 햇빛이 강한 탓에 화면이 검게만 보여 약속시간 오 분 전인 시계를 읽어내려 미간을 찌푸려야 했다. 그래도 십 오분은 기다렸는데. 츠키시마 케이는 간간히 이렇게 정중하고도 딱 떨어지게 약속을 취소한다, 그리고 유감스럽게도 그게 바로 오늘이다. 일이 생겼다는데 제 약속을 앞세워 친구를 만류할 생각은 없었지만 하필이면 이른 출발과 폭염이 겹쳐버렸다. 온 길을 다시 되짚을 생각을 하니 아득하게 막막해진다. 땀이 좀 났는지 미끈한 이마를 검지 손가락 끝으로 긁적이던 야마구치가 ​자판을 꾹꾹 눌렀다. 알았어, 츳키. 내일 보자. 뭐 이런 내용들.

화가 나지는 않았다. 열을 받은 건 햇빛을 그대로 받아낸 머리칼이나 핸드폰, 목덜미 정도지 저는 아닌 것이다. 그냥저냥 온순한 편인 야마구치가 화를 내는 적은 손에 꼽아서, 덥다고 티셔츠를 쥐고 팔락대며 혀를 빼물었음에도 친구의 탓을 하지는 않는다. 어쩌면 조금 원망해도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저 멀리 타야 할 버스가 간발의 차이로 정류장을 떠났을 때 잠깐 들었던 건 사실이지만 야마구치는 버스의 어중간하게 긴 배차 간격을 원망하기 시작했다. 하필이면 취소된 것도 점심약속이었던지라 허기가 지는 몸에 힘이 없었다. 사람들이 우르르 타고 떠난 후의 정류장은 넉넉하게 한산하다. 야마구치가 푹푹 찌는 날씨보다도 눈도 뜨지 못 할 정도로 따가운 햇빛을 불평하며 정류장 벤치에 몸을 기댔을 때였다.


“카라스노의?”


짜여진 플롯대로 흐를 리가 없는 게 인생이라지만 뜬금없는 타이밍에 예상치 못한 인물을 만날 때는 단적으로 당황스러운 법이다. 야마구치는 햇빛에 익어 조금 뜨거운 고개를 들어 그래도 큰 편인 자신보다도 훌쩍 위에 있는 상대를 마주했을 때 표정을 우스꽝스럽게 일그러트리지 않으려 부던히도 노력해야만 했다. 우시지마 와카토시? 경기 영상이나, 경기장에서나 보던 사람을 미야기 시내 한복판에서 마주하는 기분이란. 그는 야마구치를 아는 눈치였다. 레귤러도 아닌 멤버에게는 관심조차 없을 줄 알았는데. 잠깐 생각하더니 그가 카라스노의 핀치 서버라는 것 까지 기억해내고는 여기서 뭘 하는 거냐고 묻는 것이다. 야마구치는 날이 정말이지 덥다고 생각했다. 순식간에 목덜미 뒤 까지 화끈거렸다.



결단코 나란히 앉아 이야기나 나눌 사이는 아니었다. 막무가내이다 못해 조금 바보같을 정도로 호승심으로 똘똘 뭉친 다른 일학년들이 이 상황을 목격한다면 그는 '적'이니 경계해야 한다며 펄펄 날지도 몰랐다. 한번 네트를 사이에 두고 뛰었다면 상대에게서 승리하는 것 밖에 떠올리지 못하는 애들이다. 물론 시라토리자와와 경기를 뛴 게 바로 얼마 전인 상황에서 우시지마 와카토시와 담소나 나누는 게 도저히 설득적이지 못하다는 것도 사실이다.

백팔십이 훌쩍 넘는 남자 둘이 앉자 정류장의 벤치는 금세 가득 차버렸다. 주목할만한 것은 둘 중 어느 쪽도 서로를 배척의 상대로 인식하지 않고 있다는 것 정도다.​


"집에, 가는 건가요?"


가방끈을 꼭 쥐는 손 안에 땀이 흥건했다. 심장이 조금 빠르게 뛰는 것 같았다. 그는 대답을 아직 하지 않았다. 분명 웃지도, 울지도 않는 얼굴인데도 우시지마는 표정으로 야마구치에게 의문을 표했다. 무슨 뜻이냐고 묻는 것 같기도 하고, 의도를 묻는 것 같기도 해서 더듬더듬 혼자 어딜, 가고 있는 것 같지는 않아서요. 하고 덧붙였다. 그 짧은 말을 뱉는 게 어려운지 귀가 다 화끈거렸다. 우시지마는 여전히 영문 모를 표정이었지만 어쩐지 그게 그의 표정인 것 같아서 야마구치는 지레 겁을 먹기를 그만두었다.

우시지마는 이렇다 할 볼일이 있는 건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자택을 그 목적지로 두고 있지도 않았다. 집에 가는 거냐고 묻는 물음에 그런가, 하는 답을 내놓는 게 조금 엉뚱하기까지 했다. 이것저것 캐묻는 것처럼 느껴지지 않도록 조심하며 질문 몇가지를 덧붙이는 동안 야마구치는 안절부절 못하는 게 훤히 보일 정도로 긴장하던 걸 조금 풀 수 있었다. 여기서 지금까지 뭘 했는데, 요? 제법 매끄럽게 말을 더듬지 않고 이야길 할 수 있게 된 것 만으로도 어쩌면 큰 발전일지도 모른다. 우시지마는 배구부원들과 모여 스포츠용품점을 갔다가 일행과 헤어진 듯 보였다. 근방에 가장 질 좋은 서포터를 파는 가게가 근방에 있었다. 야마구치가 그 가게 이름을 대며 다녀왔느냐고 묻자 그는 꼬박꼬박 긍정의 답을 내어주었다. 대화를 주도하는 데에는 소질이 없었지만 어쩐지 계속 그래야 할 것 같은 느낌이었다.


"집이 어디에요?"
"그럼 나랑 밥 먹으, 먹으러. 갈래요?"
날이 더웠다.


야마구치의 물음에 우시지마가 대강 짚어준 주소지는 이미 그와는 한참 갈린 방향에 있었다. 버스를 계속 기다려봤자 같이 타고 갈 것 같지도 않았다. 빨간 불에 멈춘 버스 한 무리가 곧 이 쪽으로 올 것 같아서 야마구치가 가방끈이 구겨지게 주먹을 꽉 쥐었다가 놓는다. 아, 그러니까. 목덜미에 맺힌 땀이 쭉 미끄러지는 게 느껴졌다. 그 자리가 서늘하게 식는다.

왜? 요령없이 대화를 이으려 던지는 물음들에 우시지마는 눈이나 끔뻑이며 순순히 대답을 주던 참이었는데, 이번만은 납득이 어려운지 반문을 한다. 속눈썹이나 콧날 위에까지 의문이 그득 들어찬 표정이 더 짙어졌다. 야마구치가 힐끔 옆자리를 돌아보며 눈을 굴렸다. 심장이 쿵, 도 아니고 쾅, 하고 뛰었다. 마치 그가 내려 꽂던 스파이크처럼, 쾅.



야마구치 타다시는 밀어붙여지는 것에 꽤 겁을 먹는 타입이었다. 그다지 좋아하는 스스로의 성격은 아니었지만, 뭣도 없이 힘을 눈 앞에 들이밀면 저도 모르게 허둥지둥해 버리는 것이다. 시라토리자와와의 결승전에서 폐부를 짓누르던 긴장감은 아직도 코끝으로 기억하고 있었다. 그 긴장이 팽팽하게 구르고 구르다가 배구공을 터뜨려버릴 것만 같았었는데.

그는 그 에이스가 때리던 스파이크의 굉음에 무의식적으로 움츠러들고 나면 빠르게 뛰는 심장소리를 손끝으로 기억했다. 야마구치는 미들 블로커였지만 잠시나마 그 윙 스파이커를 동경했던 것도 같다.



가방끈을 꽉 잡은 손끝에 맥박이 요동치는 게 전해졌다. 이제서야 알게 된 게 몇가지 있었는데, 야마구치가 결승전에서 우시지마 와카토시의 등을 보며 느꼈던 진한 착각은 아무래도 동경과는 거리가 멀었다. 우시지마는 여전히 모르겠다는 얼굴이었다. 그렇다고 거절하지도 않는다, 여태껏 그랬던 것 처럼.


"제가 말, 했나요? 아니야. 이제 말할 거라서요."
"좋아한다고. 저랑 밥... 먹으러 가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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