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리냥] 꿈꾸는 밤의 항설

FFXIV

2018. 2. 1. 23:41

* 니드에스 有

 

 

“자고 가게, 지치지 않았는가.”

 

 그렇게 말하니까 눕긴 누웠는데 말이야. 에스티니앙은 오랜 친우 아이메리크가 권하는 침대 한 켠을 차마 거절하지 못했으나 이내 곧 떨떠름한 기분이었다. 요 며칠 새 그는 꿈자리가 사나웠다.

 전쟁 통에 병사들이 늘 겪는 악몽이 으레 그렇듯 죽은 자들의 망령 따위가 서슬 퍼런 눈을 하고 나와 괴롭히는 탓은 아니다. 푸른 용기사로 창대를 쥐고 악귀나 령 따위에 겁을 먹기에 그는 겪어야 했던 죽음이 너무나도 많고 잦았다. 인간들의 죽음은 일상적이다. 그는 사룡, 니드호그의 마지막이자 해방이었던 종언의 순간까지 함께한 인간으로써 미련도 무엇도 아닌 것을 끝내 뒤집어쓰고 나서야 가엾은 원한을 죽음의 품으로 돌려보낼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아마, 딱 그 다음날 부터였다.

 근래에 들어 그의 잠버릇은 정말이지 나빴다. 지친 몸을 제대로 쉬어주는 것도 기사의 덕목 중의 하나라는 것을 분명히 인지하고 있었음에도 일어나면 뒷목이 뻐근했다. 제대로 쉬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는 있었지만 기껏해야 이불을 걷어차 아이메리크의 불평을 사던 정도였던 잠버릇은 스스로에게도 이상하게 느껴질 만큼 악화되고 있었다.

 귀여운 수준의 잠투정 같은 게 아니다. 깊이 잠을 못 자는 건지 종종 깰 때마다 목이 바짝 말라 마시려고 둔 유리잔을 아끼던 것인데도 몇 개 씩이나 잠결에 저 멀리 던져 형편없이 깨버리고, 아무리 천이라고 하나 이불이나 시트를 길지도 않은 손톱으로 찢어놓기도 했다. 호흡을 하지 못해 목이 졸리는 기분으로 급히 일어나 숨을 몰아쉬다가 지쳐 다시 잠에 드는 것도 여러 번, 오밤중에 비명을 지르고 앓는 소리를 낸다고 걱정을 사기까지. 일어나면 몸은 항상 식은땀에 젖어있었다. 끔찍한 악몽을 꾸는 것은 틀림없었으나 내용은 기억이 나지 않아 가물가물하다. 그런 식이었다.

 제가 어떻게 자는지, 얼마나 심한지 직접 보아 아는 것은 아니지만 거리낄 것 없이 아이메리크의 옆에서 무방비로 자는 것은 어쩐지 위험하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뭐 얼마나 멀다고, 돌아가서 자도...”

“안 돼.”

“그러면, 옆 방을...”

“침대가 좁은가? 내가 내려가서 자도록 하지.”

“기사단원들 틈에서 자도 된다."

“에스티니앙.”

 

 다정하게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에 조개마냥 입을 꾹 다문 에스티니앙이 나지막하게 한숨을 내뱉더니 이불을 끌어당겨 덮었다. 아이메리크가 만족스럽게 웃으며 옆 이불을 들추고 들어와 눕는다. 내가 쟤를 어떻게 이기겠어. 아이메리크가 그러는 적은 거의 없긴 했지만, 어떤 무리한 부탁을 하더라도 저렇게 굴면 덜컥 들어주게 되는 건 에스티니앙 만의 고질병이다. 뭐라고 부연설명을 붙이든 하여간 그는 아이메리크에게 약했다. 두 분은 친우 사이가 맞지요? 여러 번 귀 아프게 듣는 질문에 인상을 쓰며 그럼 뭐겠냐고 되묻는 것도 지쳤지만, 질문자의 심리가 아예 이해 안 되는 건 아니다.

 서른씩은 거뜬히 먹은 남자끼리 어깨 맞대고 한 이불 덮는 거, 징그럽다고. 사실은 딱히 그런 마음이 드는 것도 아니었지만 불평하듯 내뱉으면 아이메리크는 알았다는 듯 웃는다.

 

“이불 걷어차도 난 모른다, 춥다고 깨우기만 해.”

“난방을 더 때라고 하겠네.”

 

 악몽을 꿀 지도 몰라, 전쟁의 뒤치다꺼리를 한참 했더니 피곤하긴 했는지 금세 목소리가 반쯤 잠겼다. 깨워주겠네. 저러다 언제쯤 자려고, 여전히 또렷하기만 한 목소리를 들으며 에스티니앙이 눈을 감았다. 악몽의 내용까진 구태여 말 할 필요 없겠지.

 선잠이 들면 이미 영혼까지 조각조각 찢어져서 뒤져버렸을 용대가리의 시뻘건 두 눈과 시선을 마주치곤 했다. 빌어먹을 녀석이 죽어서까지도 하찮은 인간 하나 용서하는 법을 모른다고, 그는 늘 불만이었다. 제가 악몽을 꾸며 비명을 지른다는 소리를 들어도 그랬는지 기억도 못하는 주제에 그 악몽의 내용은 정확히 예상할 수 있었다. 달리 무엇이 꿈속에서까지 지랄을 하겠냐마는 감히 헤아릴 원한의 깊이가 아니었을 테니 그럴 만도 하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얼마나 지독하게 굴었으면 유리잔을 열 세 개씩이나 깨먹는 거냐며 에스티니앙은 자신이 아이메리크만은 맞은 편 벽으로 집어던지는 일이 없기를 바랐다.

***

 커헉, 컥. 목구멍 속에서부터 끓어 삐걱대는 그 소리는 교살과도 닮았다. 목이 졸리는 것 마냥 숨을 쉬지 못 하며 눈을 감은 에스티니앙이 버둥대며 이불깃을 쥐어뜯었다. 새하얀 침구는 형편없이 구겨져 위태하게 늘어난 채였다. 하룻밤 새 세 번째였다.

 호흡곤란인지, 과호흡인지, 어쩌면 둘 다인지. 에스티니앙이 숨을 못 쉬고 헐떡이는 소리에 얕게 자던 잠을 방해 받았으면서도 아이메리크는 그저 걱정스러운 얼굴이었다. 땀에 젖은 얼굴이 붉게 달아오른 채 그는 괴로워하고 있었다. 길고 얇은 은색의 머리칼이 제멋대로 뺨이며 목덜미에 달라붙어 살갗을 멋대로 조른다.

 처음 잠에서 깼을 때, 아이메리크는 그 속박을 자유롭게 하려 그의 이마를 쓸어 넘기다가 이내 사납게 눈을 뜬 에스티니앙에 의해 손목을 붙잡혔었다. 깨어 있었냐며 웃어 보이려 했으나 그 때의 에스티니앙은 어딘가 이상했다. 수 십 년 검을 잡아 단단한 뼈를 아리도록 세게 움켜쥐어 죽일 듯 노려보더니 제 풀에 지쳐 풀썩 쓰러졌다. 그 때의 눈빛이 핏줄이 다 충혈 되어 벌갰다. 아이메리크는 얼른 그를 받쳐 안고 등을 쓸어 달래면서도 덮치는 기시감에 뒷골이 서늘했다. 갑자기 사시나무 떨듯 몸을 떨어 사색이 된 총장이 의원을 부르려 했으나 그마저도 옷깃을 꽉 쥔 에스티니앙의 손이 걸려 하지 못한다. 그렇게 한참을 안아주니 식은땀을 뻘뻘 흘리면서 그는 새우잠에 들었었다.

 그 후로도 몇 번이고 깜빡깜빡 정신이 들었는지 그는 몸을 일으키지도 못하고 목을 쥐어뜯었다. 그 모습이 안쓰러워 아이메리크는 성급히 그 팔을 잡아 말렸으나 잔뜩 겁먹어 이를 세우고 달려들자 손 놓고 지켜볼 수밖에 없다. 싸우는 게 곧 일이다 보니 손톱이 길면 종종 부러지는 탓에 기사들은 언제나 손톱을 둥글고 짧게 깎는다. 그러고도 약간 남은 손톱으로 여린 목덜미 부근을 사정없이 박박 긁으니 금세 빨갛게 자국이 올라오고도 남았다. 짐승이 손톱을 가는 것과 마찬가지로 목을 피가 맺힐 정도로 긁어대니 견디지 못하는 것도 당연했다. 헐떡거리는 게 금방이라도 넘어갈 것처럼 군다.

 

“에스티니앙, 그만...!”

 

 에스티니앙은 물에 빠진 나비처럼 가여운 날갯짓을 했다. 숨을 못 쉬는 제 목을 조르며 살려달라고 뻐끔, 외치는 것이다. 저러다가 진짜 죽어버릴까 아이메리크는 침몰하는 양 팔뚝을 잡고 그를 말린다. 소용없지 싶은 것은 에스티니앙이 눈을 벌겋게 뜨고 잡히는 대로 물어뜯기 때문이었다. 푸른 용기사의 악력이든 뭐든 버티는 게 용하다 싶을 정도인데 버둥거리는 것을 잡아 누르고 품에 꽉 안아 달랜다. 그가 손톱을 세워 제 팔을 할퀴고 목덜미에 이를 박아 넣는 것 정도는 애교로 넘길 수 있다는 태도였다.

 몽롱하게 뜬 눈이 아무래도 아직 정신은 깊이 잠들어 있는 것 같았다. 생리적으로 맺힌 눈물이 기어코 쭉, 미끄러져 떨어지자 아이메리크가 소매깃으로 뺨을 문지른다. 몸에 경련이 차츰 잦아들자 그제서야 늘어진 육신이 따라 잠에 드는 모양이었다. 속삭이는 것인지 앓는 것인지, 숨소리에 섞여나오는 잠꼬대가 고통스러웠다.

니드호그, 니드호그, 니드호그.

 

***

 

 조금 정신을 놓고 자도 알아서 깨워주겠지, 하는 막연한 바람을 배신하고 느즈막한 아침에야 눈을 뜬 에스티니앙의 옆에서 아이메리크는 깊은 잠에 빠져있었다. 아홉 시 삼 분. 평소보다 세 시간은 더 잤음에도 여전히 무거운 어깨에 에스티니앙이 늘어지게 하품을 했다. 일부러 더 자라고 안 깨운 건 아닌 것 같고. 평소엔 자명종 같은 것 없이도 여섯시면 칼처럼 기상해 저를 흔들어 깨우곤 했던 아이메리크의 늦잠이 의아하긴 하다. 오늘 아침 회의같은 건 없나보지? 알아서 하겠지, 싶은 마음에 제 가슴위로 올라온 가무잡잡한 팔을 내팽개치고 일어난다.

 오래 잤는데 가실 기미가 보이지 않는 거울 속 얼굴은 가만히 있으면 피곤이 엿보였다. 이 정도야 대충 티 내지 않으면 아무도 알아보지 못 하겠지만, 혹여나 눈 밑이 퀭하여 누군가 피곤하느냐고 묻기라도 한다면 짜증이 날 것 같아 에스티니앙은 찬물로 얼굴을 박박 문질렀다.

 어제 저녁, 아이메리크가 여기서 자고 가라고 권유했을 때, 실은 함께 잔다면 조금 더 편하게, 깊이 잘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던 건 사실이었다. 어쩐지 그 녀석과 있으면 긴장이 풀리는 건 원래 그랬으니까. 그럼에도 영 제대로 못 잔 것 같은 이 기분은 평소와 똑같다. 아닌가, 평소엔 이것보다도 더 못 잤었던가. 잠결에 들리던 아이메리크의 부드러운 목소리를 회상하며 그의 방에 딸린 욕실 벽 칫솔걸이의 칫솔 두 개 중 오른쪽 것을 집어 문다.

 

“왜 이렇게 잠을 못 자는 것 같지, 수면장애인가.”

 

 분명 취침시각과 기상시각에 차이는 없는데 예전 같지 않음에 에스티니앙은 짜증스럽게 머리칼을 정돈했다. 거울 속 뻗친 머리의 자신을 한참 노려보던 그가 티셔츠를 옆으로 젖혀본다. 이게 뭐지? 이런 상처가 났었나. 긴가민가하여 아랫자락을 쭉 들어 올려 상의를 벗자 비슷한 자국이 드문드문 찍혀있다. 수없이 그인 빨간 손톱자국과 크고 작은 멍. 하얀 피부 위로 팔뚝이나 목덜미 부근에 밀집 자국이 몇 개씩이나 되어 울긋불긋하다.

 뭐, 전투의 흔적이 아니라면 관심 둘 것도 없다. 중요한 건 간밤에 땀을 흘렸는지 찝찝하다는 것. 에스티니앙은 곧 벗어낸 옷가지들을 대충 던져두고 샤워부스로 향했다.

 

“...아이메리크!”

 

 안 일어나? 짜증 섞인 목소리가 누구 것인지 자명하여 아이메리크는 이불에 파묻힌 채 눈도 뜨지 못하고 슬며시 미소지었다. 깨었으니 걱정말게. 기어들어가는 목소리가 금방이라도 다시 깜빡 잠에 들 것 같아서 에스티니앙이 안 되겠다며 이불을 확 채어간다. 간밤에 걷어찬 것 같아 미안해서 덮어줬더니. 애새끼도 아니고 아침잠을 못 깨어서 난리냐며 이불을 걷어내는 그에게서 제 샴푸냄새가 났다. 정말 아침잠을 못 깨는 게 누군데.

 

“진짜 일어났어, ...알았다니까.”

 

 새벽에 얕은 선잠만 몇 번 들었다가 깨는 것을 반복하여 결국 한 숨도 못 잔 아이메리크는 얼른 잠을 떨쳐내고는 흐트러진 모습을 정리했다. 이런, 늦잠이군. 무방비함이 몇 초가지 않는 철저함에 에스티니앙이 혀를 내둘렀다.

 

“그렇게 철저한 놈이... 잠 못 잤냐?”

“너는?”

“나? 나야 잘 잤지.”

 

 자다 깨다 한 것 같진 않으니까? 확신은 없는 표정에 아이메리크가 미간을 살풋 구겼다. 저 녀석, 아무래도 기억을 못 하는 것 같네. 샤워까지 하면서 몸에 잔뜩 남은 붉은 자국을 못 봤을 리는 없으면서도 따로 의아해 하는 기색도 없고. 정말이지 아무 경각심이 없는 것이 틀림없었다. 수건을 두른 채 아무것도 입지 않아 적나라하게 드러난 멍 자국 들은 도무지 가볍게 넘겨짚을 만한 모양새가 아니었음에도 에스티니앙에게 상처란 발톱과 창에 찔린 상흔 외에는 취급하지 않는 것 들 뿐이다. 왜? 하는 물음에 가볍게 고개를 턴다.

 

“아니야, 씻고 오지, 늦었지만 아침 같이 하겠나?”

“음식이 남아 있다면 말이야.”

 

 옷이나 입고 있어, 고개를 주억거리며 제 옷가지를 뒤적이는 뒷모습을 보는 아이메리크는 심란한 얼굴이었다. 잠들기 직전까지 맴돌던 그의 가라앉은 목소리가 제 발목을 잡고 끌어내린다. 니드호그... 죽었을 것이 분명한데도. 에스티니앙은 분명히 그 이름을 부르고 있었다. 뭔가 잘못된 것이 틀림없었다.

 

***

 

 사이가 좋은가봐. 얘, 그게 아니야. 그러면 뭔데? 뒤에서 소곤소곤 들려오는 목소리는 낮춘다고 낮췄음에도 지나치게 또렷하다. 지나치게 감이 기민하여 휙 뒤돌아보는 에스티니앙의 팔을 얼른 잡아 제자리로 둔다. 왜? 영문을 모르는 듯 묻는 친우에게 아이메리크는 아무것도 모르는 척 숙녀들을 빤히 바라보면 실례라고 거짓말을 했다. 내 얘기인 것 같았는데... 뒷머리를 매만지는 그가 크게 마음 쓰지 않고 배가 고프다며 성큼성큼 앞질러 가자 그제서야 아이메리크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무슨 이야기가 떠도는 지는 아이메리크도 바보가 아닌 이상 모두 알고 있었다. 총장직을 맡게 된 후로 직접 겪은 정치판은 어린, 어렸던 자신이 알던 것보다 훨씬 난잡하고 엉망진창인 곳이었다. 별의 별 추잡한 소문이 나뒹구는 가운데 결코 그 모든 것을 무시해선 안 된다. 아이메리크는 그런 추문들의 주인공이 되는 것도 꺼려선 안 된다는 걸 알고 있었다.

 이건 루키아가 굉장히 무례하고 불쾌하다는 얼굴을 하고 보고하던 최근의 ‘소문’에 관한 것이다. 아이메리크 총장과 푸른 용기사 에스티니앙 공에 관한. 아이메리크는 상대에게 이 말도 안 되는 부끄러운 소식에 대해 알릴 생각이 추호도 없었다. 차라리 그가 알지 못하게 눈을 가리고 귀를 막는 편이 아무래도 편리했다.

 각별한 친우 사이로 소문난 총장과 푸른 용기사가 나누는 것이 사실은 우정이 아니라더라. 둘 사이가 너무 각별하여 결국 서로가 욕정한다더라.

 입에 담기도 부끄러운 말이었다. 솔직하게 고하자면 반은 맞는 말이긴 하다. 쌍방의 반절은 일방이 아니겠는가.

 

 그건 아주, 오래된 감정이었다. 아이메리크가 에스티니앙에게 욕정한다는 것은. 공공연히 드러내도 털끝만치도 눈치를 채지 못하여 반쯤 놓아둔 마음이긴 하다만. 에스티니앙이 안다면 기함을 할 소리겠지만 각별한 친구사이가 마음이 맞다가 배까지 맞는 것이라는 심보였다. 이야기가 어떻게 와전되든 딱히 상관은 없었지만... 힐끔 뒤를 돌아보자 앳된 얼굴의 두 여성이 시선을 느끼고 귀까지 빨개져서는 뒤를 돌아 종종걸음 쳤다. 관자놀이가 지끈거려 그는 한숨을 뱉는다. 괜히 입을 잘못 놀리다가 에스티니앙의 귀에 들어가기라도 하는 날에는 성도가 발칵 뒤집히는 걸로 모자라 한동안 시끄러워지리라는 걸 그는 확신할 수 있었다.

 에스티니앙은 늘 그렇듯 날카로운 갑주 차림이었다. 둘의 평소 오찬에 비하면 훨씬 늦은 아침이긴 했으나 사실 그건 그들의 평소가 지나치게 부지런했던 탓이다. 다행히 오늘 아침은 여유롭다며 아침식사를 권하자 에스티니앙은 딱히 거절하지 않았다. 뭐, 아침 훈련 한 번 정도는 총장의 권한으로 뒤로 미뤄도 되는 범주였던 것이다. 대충 묶고 나왔는지 흐트러진 은빛 꽁지머리를 먼저 식사를 마친 아이메리크가 제대로 정돈하여 다시 끈으로 동여맨다.

 

“뭐야?”

“훈련은 정오에 가볍게 하겠다고 하더군, 아마 다시 성도 밖으로 나가야할 것 같다고.”

“그렇겠지.”

“잘 다녀오게.”

 

 아, 이왕이면 투구는 벗지 말고. 매끄럽게 묶은 머리칼이 걸리지 않게 투구까지 씌워준 아이메리크가 순진하게 웃는다. 싱겁긴. 갑주에 투구를 쓴 에스티니앙은 항상 그렇듯 딱딱한 무표정으로 보였다. 벽에 세워둔 창을 챙기고는 간다, 한 마디 짧게 남긴다. 일곱 걸음 옆에 문이 있는데 말이야, 창밖으로 휙 뛰어내린 그를 말릴 수 있는 사람은 제가 알기로 없었다.

 단 둘이 하는 식사라서인지 투구를 옆에 벗어두고 스프를 떠먹던 에스티니앙은 고개를 아주 약간만 숙여도 목덜미의 손톱자국을 훤히 드러내고 있었다. 괴로움을 못 이겨 울듯 신음하며 스스로 깊게 박아 넣었던 처절함의 흔적은 깊이 스미어 짙다. 흰 피부와 극명한 대비를 이루는 탓이었다. 그런데 뭐랄까. 아이메리크는 그렇게 불손한 생각을 하는 자신을 몇 번이고 책망하면서도 그 색조가 사뭇 야하다고 생각했다. 오찬에는 도무지 집중할 수 없었던 이유는 다른 게 아니었던 것이다. 마치 엉망진창으로 행해진 정사의 흔적마냥 맨살을 뒤덮어 올라간 손자국과 손톱자국은 ‘이성적으로’ 생각해도 오해의 소지가 충분했다. 이렇게 파렴치한 상상이라니, 스스로도 변명의 여지가 없다.

 아이메리크는 깊은 한숨을 내뱉으며 자신이 여태 불건전한 대상화의 주인공으로 삼았던 친우가 뛰어내린 창틀에 기대어 섰다. 찬바람을 맞는다고 정신이 번쩍 들지는 않을 거라는 걸 스스로 아는 걸 보면 그는 아직 아주 이성적이었다.

 그날 오후는 날씨가 아주 나빴다. 늦은 아침까지는 그렇게 해가 쨍쨍하여 휴일 마냥 굴더니 갑자기 눈보라가 몰아치는 것이었다. 날씨가 제 정신 상태를 반영하는 것인지, 심란함에 절어 내내 기분이 좋지 않던 아이메리크가 몇 번째인지 모를 한숨을 내쉰다. 에스티니앙의 깊은 곳에 남은 불청객의 잔재도, 그와 자신을 무겁게 둘러싼 뜬구름의 소문도. 신경 쓰이는 것은 한 둘이 아니다. 여인들의 소곤거리는 목소리가 어절 하나까지 정확하게 들려오곤 했던 것이다. 저한테 들린다면 분명히 그에게도,

똑, 똑.

 예의 바르게 울려퍼지는 간결한 노크 소리에 아이메리크가 정중히 화답했다. 문이 열리면 들어 온 시녀 한 명이 에스티니앙 공이 돌아오셨는데요, 하고 알린다. 아이메리크는 복잡한 생각을 모두 접는다. 그리 키가 작아보이지도 않던 여자 뒤에서 머리 두 개는 큰 에스티니앙이 불쑥 튀어나왔다. 자연스럽게 투구를 벗으며 성큼성큼 걸어 들어온다. 아이메리크는 새삼 가슴이 두근거리는 걸 느꼈다. 은빛 머리칼은 오전에 묶어준 것이 풀렸는지 투구를 벗자 안에서 쏟아져 나오며 목선을 타고 흘렀다, 그 장면에 홀린 듯 눈을 떼지 못 한 건 분명 주책일지도 모른다. 머리카락은 반나절동안 조금도 나아지지 않은 손톱자국들을 겨우 가리다가 말았다.

 

“아, 자네 왔는가.”

“그래, 아까도 봐 놓고서는. 뭘 또.”

 

 그의 뒤에 서 있던 시종은 조심스럽게 문을 닫는다. 복도에 누가 또 있었던 것인지 여인네들의 속삭임이 귀가 예민한 엘레젠의 청각에 공교롭게도 모두 잡힌다. 봤어? 봤어, 손톱자국?─진짜 맞나봐. 호들갑을 떨며 종종걸음으로 멀어지는 것까지, 닫힌 문 너머로 모두 들은 것은 마찬가지일 텐데도 전혀 마음 쓰는 내색이 없는─아마 왜 그래야 하는 지도 모르고 있을 것이다─에스티니앙에게 아이메리크가 사람 좋게 웃어보였다. 이리 좀 와보게. 벗은 투구와 창을 잘 갈무리 해 치워둔 에스티니앙이 눈썹을 치켜올리면서도 집무실 책상 맞은 편으로 와 선다.

 

“그 쪽 말고, 이 쪽.”

 

 에스티니앙은 뭘 귀찮게 따지냐는 표정이었는데, 그의 이런 표정이 너무나도 일상적인 것이었기에 그 의미를 가감 없이 알아챈 아이메리크였지만 다른 말로 달래지는 않는다. 이 표정을 한 에스티니앙이 군말 없이 요구에 따르는 것도 상대가 그였기에 가능한 일이라고 볼 수 있다. 에스티니앙은 책상 안 쪽으로 돌아 와 선다. 결재를 하던 서류를 모두 정리해 치운 아이메리크가 자리를 비키더니 제 집무실 책상의자에 그를 앉혔다.

 손 좀 주게. 에스티니앙이 고분고분 손을 내밀었다. 제 갑주도 아닌데 능숙하게 팔뚝부터 손을 감싼 미늘을 벗겨낸다.

 

“왜 그러는데?”

“손 펴고 있어.”

 

 희고 긴 손가락을 곧게 펴자 아이메리크는 그 옆에 서서 허리를 숙인 채 책상 위에 깐 티슈 위에 대고 그의 손톱을 잘라내기 시작했다. 뭘 하려는 건지 전혀 예상가던 바가 없었던 에스티니앙이 입을 다물자 침묵이 내려앉는다. 톡, 톡.

 갑자기 손톱은 왜. 최근에 자른 기억이 없긴 했지만 그리 눈에 띄게 긴 것도 아니라, 둥글고 깔끔하게 다듬어져 있는 손을 잡는다. 에스티니앙이 간질간질한 기분에 저도 모르게 손끝을 움찔, 오므리자 아이메리크가 부드럽게 손바닥 부터를 쓸어 받쳤다. 검과 창을 쥐어 박힌 굳은살이 서로 쓸리자 말랑한 감촉은 없고 딱딱한데다 거칠기만 했다, 그 부분에 불만을 갖는 사람은 없었지만. 서로의 사명이 무엇인지는 다른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사이인 것이다. 아이메리크가 작은 키가 아니었기 때문에 에스티니앙의 앉은키에 맞추려면 등을 구부려 숙여야했다. 에스티니앙은 눈을 깜빡인다. 인간의 몸에서 두 번째로 단단하다는 손톱이 가볍게 잘려나가는 소리가 시계초침, 혹은 심장박동과 닮았다.

 손톱자국이, 어쩌구. 그러고보니 어디서 누구한테 들은 것 같은데. 에스티니앙은 짧게나마 머리를 굴렸다. 무슨 일이지? 상념에 빠진 듯 눈빛이 멍하자 아이메리크가 별 것 아니라는 듯 웃는다. 그냥,

 

“창을 쥘 때 불편하지 않은가.”

 

 길면, 그렇기야 하겠지. 에스티니앙은 입을 다물고 있으면 꽤 얌전해 보였으므로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복도를 스쳐 사라지던 시종들의 목소리가 기억에서 뭉뚱그러져 묻힌다. 둘이, 잤나?

 톡, 톡. 손톱깎이는 왼손 약지를 향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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