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카쿠로] Morendo

HQ

2016. 6. 12. 03:38

​​​​​Morendo : 점점 느리고 사라지듯이





홀 안을 울리던 음들이 가늘게 여운에 진저리치며 가라앉는다. 곧 찾아드는 정적은 가볍고도 무게감이 있었으나 오래가진 못한다. 터져나오는 우레와 같은 박수소리에 단정한 인사로 화답하는 아카아시는 이 순간에 희열을 걸쳐두었다. 모두들 입을 모아 말하길─듣고 있자면 벅차오르는 이브닝 쇼였다.





세간의 시각으로 둘의 차이를 논하자면, 한쪽은 '천재 피아니스트', 다른 한쪽은 '천년에 한번 나올, 말이 필요 없는 천재 피아니스트' 정도의 차이다. 쿠로오 테츠로, 도쿄의 작은 음대를 휴학한─나오지 않은 기간을 보면 거의 자퇴를 했다고 보아도 무방하겠지만 학교측에서는 그를 놓아줄 생각이 없는 모양이다─그저 한 명의 대학생. 고등학교를 조기졸업하고 음악 대학 버클리를 다니는 아카아시와는 상당히 다른 루트다. 오직 대학생을 위해 열린 작은 콩쿠르에서 따낸 칭호는 천재라고 불리기를 뛰어넘었고, 나름 소박한 발걸음을 계속하는 중인 그는 본의는 아니지만 대중의 관심이 집중되는 몸이었다. 착실한 엘리트의 루트를 밟아 온 아카아시는 조회되는 기사의 사진 속에서 대체로 나비 넥타이와 턱시도 차림이었지만, 쿠로오는 야구잠바나 스카쟌, 청바지에 겨우 눌러 쓴 스냅백이 다였다. 물이 끓어넘치듯 훅 수면 위로 떠오른 쿠로오와는 다르게 아카아시는 꾸준한 칭송의 대상이었는데, 한살 터울의 비슷한 나이대나 국적, 극단적으로 대조되는 과거 루트 때문인지 언론은 한 기사 안에 둘의 얼굴을 나란히 띄워놓고 비교 분석, 혹은 시시콜콜한 가쉽을 까내리는 것을 좋아했다.​

​아카아시는 원한 적도 없는데 이미 왕좌 위에 올라앉은 ​케이스였다. 중학교, 고등학교는 조기졸업. 억소리 나는 명문대의 학년 수석이었으며, 장학금을 받고 스물 셋에 이미 졸업을 하고 난 뒤에는 각종 콩쿠르나 연주회의 러브콜이 쏟아졌다. 객석은 그에게 환호와 키스를 보낸다. 그런 그는 음악성이라고는 단 한톨도 찾아볼 수 없는 그 함성소리에서 애매한 희열을 느끼며 여느 때처럼 단정하게 고개를 숙여보이는 것이다.


"오랜만에 보네."
"연주회, 결국 안나가겠다고 하셨다면서요? 담당자가 울상을 짓고 대기실로 찾아오던데."
"널 찾아가면 뭐가 해결된다고."
"그래서 그럼 저도 안나가겠다고 했을 뿐입니다."


아카아시 군, 성격 나쁘네. 웃음을 터뜨리는 쿠로오가 아카아시를 대할때는 모로보나 인터넷이나 방송이 왈가왈부하는 '라이벌'의 태도가 아니다. 그러는 쿠로오씨도 좋지만은 않잖아요. 얼마나 많이 치는지 굳은살이 다 배긴 손을 물끄러미 응시하며 담담하게 받아치는 아카아시를 그는 부정하지 않는다. 쿠로오는 원한 적도 없는데 왕좌에 앉은 아카아시를 끌어내리고 그의 명예를 거머쥐려 손을 뻗는 중이며, 사실 신인이 아닌 거인이었다─정도의 케이스다. 실은 그건 모두 겉치레이며, 몇년 전부터 친하게 지내는 사이가 현세기의 모차르트와 살리에리에게 적용된다는 사실은 아는 사람이 몇 되지 않는다. 쿠로오가 아카아시에게 보이는 웃음에 어떠한 속내도 없다는 것은 어쩌면 그가 살리에리가 아닌 모차르트에 대입되기 때문일지도 몰랐지만, 함께 웃어주기 보다는 조용히 옆을 지키는 아카아시는 적어도 살리에리가 아니었다. 한 시대의 악보를 평정했던 두 음악가의 대치 구도에서 승리자─모차르트는 상대에게 열등이나 견제를 보이기 보다는 순수하기에 전념했다는 사실로 미루어보면 쿠로오 테츠로와 아카아시 케이지는 정말이지 나쁜 사이가 아니었다.


"왜 거절하셨어요?"
"귀찮으니까. 너까지 때려치게 할 생각은 아니었는데."
"대중의 사랑을 받는 쿠로오 씨, 저는 별로라서요."


비약이 심하다. 아카아시 케이지는 종종 그런 사람이었다. 쿠로오는 곧잘 그 간극을 웃어넘겼다.


"너무 대놓고 견제하는 거 아닙니까? 쿠로오 씨 조금 섭섭할지도."





쿠로오 테츠로의 연주는 유연하고 부드럽다. 조예가 깊은 자들은 저마다 몇가지 씩의 형용사들을 붙여가며 곡 안에 자연스레 기교를 녹이는 그의 기술을 노래했지만 보통의 경우에도 그의 곡은 심금을 울렸다. 거의 캐주얼을 즐겨 입는 그의 이너는 대충 꿰어 입은 티가 나는 흰 면티셔츠일 때가 대부분이었다. 목 부근이 헐거워져 있는 것도 신경쓰지 않는 내추럴함으로 음악에 전혀 문외한인 자들의 마음을 움직일 줄 안다는 것이 그가 천재라고 불리는 이유가 아닐까.

객관적으로 보았을 때 쿠로오는 정말이지 성실한 편은 될 수 없었다.
​ 대학은 중퇴나 다름이 없었고 수많은 눈이 따라붙는 그는 민간인의 신분으로 파파라치까지 거느려 보게 되었으나 특유의 재치와 피지컬, 음악인으로서 어울리지만은 않는 운동신경으로 유유히 빠져나가는 데에 도가 텄다. 공식석상은 물론이고 작은 음악회에서도 공개된 쿠로오 테츠로의 연주라는 게 극히 드물며, 하다 못해 연습영상 하나 공개 된 게 없으니 신비주의를 넘어 성원에 대한 보답 의지가 마이너스를 뚫는다는 평을 받는 것도 당연했다. 결국 얻어진 이미지는 노력을 이기는 재능을 타고난 방탕한 대학생 정도가 되어버렸지만, 쿠로오는 정말이지 그 토씨 하나도 신경쓰지 않는다. 어쩌면 그것도 능력이라면 능력이다. 반면 아카아시는 착실한 엘리트인지라 카메라 렌즈를 통해 보여지는 것이 더할 나위없이 익숙했다. 극명한 대비에 심화되는 라이벌 구도가 부각되면 부각될 수록 보여지는 건 아카아시의 천재성이지 그의 노력이 아니다. 결국 대중앞에 까발려질 때면 그들은 어느 한쪽도 고유의 노력을 인정받을 수 없었다. 처음부터 가려놓은 쪽과, 피나는 노력을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쪽. 아카아시의 연주가 '절제되었으며 힘이 있다'고 표현되는 이유는 순전히 쿠로오와의 비교에서 그의 이면만을 강조한 결과다. 아닌 척 하지만 아카아시는 예민한 음악가들이 모두 그렇듯, 아주 평범하게도 스스로의 섬세함을 부정당하고, 침해받는 것을 싫어했다.

─어느 쪽이 더 가여운가요?


"또 나란히 기사네요. 항상 궁금했지만 이런 가쉽, 쿠로오 씨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별 거 없잖아─알아서들 왈가왈부 하라지 뭐."


아카아시 케이지는 가끔 부정에 대한 목적을 잃는다.

정처없이 떠도는 허무에 떠밀려 허우적댈 때마다 그는 애증에 휩싸였다. 스스로의 감정이 넘치는 것을 죽도록 싫어하는 이유는 그럴때마다 자신이 미워해야 할 대상을 분명히 하기가 어려운 까닭이었다. 아카아시는 무엇이든 모호한 게 싫다. 그는 모두가 그들의 대비를 주목하는 순간에마저 서로에게 친절한 이 상황에서 무감정하게 질투를 입에 담는 것으로 모호함을 해소했다. 말 한마디면 적군이 되어버리지만 가장 긴밀한 아군이다. 그 앞에서 그를 배척할 단 하나, 문제의 키워드를 내뱉는다. 실은 자기 자신조차 스스로의 모순을 이해할 수 없었지만 그는 독처럼 진실만을 입에 담았다.


"대중의 사랑을 받는 쿠로오 씨, 저는 별로라서요."
"너무 대놓고 견제하는 거 아닙니까? 쿠로오 씨 조금 섭섭할지도."


아카아시는 늘 진심만을 말했고 쿠로오도 그 사실을 안다. 그럼에도 민감한 부분에 제대로 와 꽂힌 키워드는 언제나 오작동이었다. 이런 말을 하는데 죽어도 견제하실 마음은 없어보이시네요─그게 네 진심은 아니잖아. 아카아시는 그럴때마다 조금 더 진심을 담아 보겠다고 생각하지만 그게 쉽게 되지는 않았다는 게 쿠로오의 비공식 데뷔 이후 근 삼년 간의 문제였다. 그들은 여전히 라이벌도 무엇도 아닌, 그래. 메이트(mate)였다─동갑이 아닐 뿐이지 너무나도 친구에 가까운.


"진짜로 거절했어, 너도?"
"네."


아카아시가 싫어하는 것이 세가지 있었는데, 하나는 몇달 밤을 새운 연습을 간과하는 것, 또 다른 하나가 대중에게 사랑받는 쿠로오라면 마지막은 이 정적인 메이트 관계였다.


"그럴 필요까지 있었나, 그럼 같이 하자."





기사가 났다. 아카아시 케이지와 쿠로오 테츠로가 처음으로 공식석상에서 대면한다는 내용이었다. 그 떠들썩함에 양쪽은 모두 질렸는지 귀를 막았다. 아카아시는 암막 커튼을 치고 잠을 잤고, 쿠로오는 늘 그랬듯 제 집에서 피아노를 쳤다.

진절머리가 났다. 망설임 없이 시선을 거부할 땐 언제고 또 피어오르는 기대감과, 옅은 흥분을 묻으려 손끝에 꼭꼭 힘을 주어 눌릴 건반이. 질투가 났다.





​쿠로오 테츠로는 연습벌레다.─피아노를 치는 사람들이 대부분 그렇듯 단단하면서도 곱게 뻗은 손가락은 다른 모든 걸 제치고 그의 보물이었다. 조금 낡았지만 열심히 관리한 덕에 깨끗한 음을 내는 그의 피아노가 그 다음이었으며, 여의치 않을 때 꺼내어 연결하는 전자 키보드가 세번째다. 언론이 뭐라고 떠들든 그는 그의 음악을 사랑했다.

그는 여전히 자취를 한다. 수많은 기자들이 쿠로오 테츠로의 집 앞에서 잠복을 하며 아침의 부스스한 모습이나, 귀가하는 모습등을 포착하기를 희망했지만 쿠로오는 아주 영악하게도 그럴 기회조차 주지 않았다. 기자 따돌리기에는 특출난 재능을 보이는 그의 자취방은 반지하다. 가난하기만한 편은 아니라 꽤 넓고 방음도 그럭저럭 빈틈이 없다. 피아노를 들여오는 데에도 문제가 없었으니 거의 연습실이라고 보아도 되는 아지트였으며, 그가 가장 사랑할 수 있도록 고립된 장소였다. 쿠로오는 인적이 드문 거리의 땅 아래에서 혼자만의 음악을 즐기는 것을 사랑했기 때문에, 누구도 그가 음악을 피워내는 곳을 알지 못하기를 바란다.

아카아시는 쿠로오의 집이 어디인지 알고 있었다. 레드카펫을 깔아서라도 모셔가려 드는 연주회는 거부하고 친구의 작은 재즈바에서 피아노를 치는 쿠로오를 우연히 발견했던 그 날부터였다. 인터넷이 연결된 곳에서 사는 사람이라면 그 정도의 거물이 제 가게에서 보잘 것 없는 피아노의 건반을 두드려주는 데 칵테일 정도는 공짜로 내놓을 수 있을 터였고, 그래서 둘은 과음했다. 엄밀히 따지자면 과음한 쪽은 하나였지만, 아무튼 그 날부터 아카아시는 그의 집이 어디인지 알고 있었다.

어쩌면 그래서 우연만은 아니었던 것이다.




아카아시 케이지와 쿠로오 테츠로의 기적적인 합석을 보도하던 인터넷이 또 한번 뜨겁게 달아올랐다. 최초 기사가 올라온지 이틀도 채 되지 않은 시점이었다. 클릭 수에 환장하는 싸구려 신문사들이 내 건 헤드라인은 언제나처럼 과장에 부풀어 자극적이었지만 이번만은 현실과 판타지스러운 제목 간의 괴리감이 실로 덜했다.

[ 쿠로오 테츠로, 괴한에 습격. 손가락 완전히 망가져─ ]




피아노를 들여야겠다고 말했을 때 부터 그의 반지하는 방음이 잘 되는 곳이었고, 쿠로오는 종종 그의 두 귀를 제 연주를 듣기 위해 존재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었다. 같잖은 양복을 걸쳤지만 시커멓게 몰려다니기에는 성공한 무리들이 쿠로오의 반지하 현관문을 멋대로 열어젖혔다. 보안을 어떻게 하시는 걸까. 울림이 조금 있는─그의 고질적 불만이다─실내에 낯선 이의 목소리가 울려퍼지고 나서야 쿠로오는 인기척을 눈치채고 손을 멈췄다. 그렇게 그는 이유 없는 폭력의 대상이 되어 버린다.

괴한이나 조폭, 깡패. 명사는 굳이 심사숙고할 필요없이 아무거나 가져다 붙여도 상관이 없을 것이다, 그들에게 자비나 어떠한 동정심이 존재했다면 이미 각목을 들고 남의 거주지를 침해하는 만행은 저지르지 않았을 것이라는 게 자명했으니까. 지폐몇장이면 고용되어 온갖 더러운 일을 도맡는 그들에게 문단속마저 싱겁게 하는 쿠로오는 손쉬운 의뢰대상일 것이었다. 쿠로오는 셔츠 안에 자주 받쳐입던 목 부근이 헐렁한 면티셔츠를 입고 있었는데, 맹세코 그 전까지는 그 티셔츠가 발자국이나 핏자국에 뒤덮일 일이 있을 것이라고는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그는 주먹을 쥐고 몸을 웅크렸다. 몽둥이 비슷한 게 날아오는 걸 보았을 때는 이미 눈을 감고 고개를 숙인 채, 가장 소중한 손을 곱아 쥐고 품에 안은 채였다. 꼴 사납단 이유로 기자도, 연주회도, 인터뷰도 족족 거절하던 그는 필사적이었다. 둔탁한 소리와 함께 시선의 필름이 흐려진다. ─어쩌면 그래서 우연만은 아니었다. 쿠로오는 억지로 반쯤 뜬 시야가 불그스름 한 이유가 찢어져 욱신거리는 이마에서 흐르는 피가 섞여서라는 걸 알고 있었고, 쓰러진 제 앞에 선 검은 정장 바지의 주인이 누구인지도 알고있었다. '같잖은 양복'들과는 다르게 칼같이 다려진 주름의 흔적만 보아도 아는 것이다.

그가 쿠로오의 손을 잡았다.





완성된 음악만을 꺼낼 때 사랑받을 수 있잖아.

연주회에 얼굴을 보이지 않는 이유는 하나였다. 그는 아직 준비가 덜 되었다고 생각했으며, 실은 지독한 완벽주의자였다. 기꺼이 날개를 찢어놓은 이유는 언제나와 같다. 나는, 대중의 사랑을 받는 당신이 싫습니다. 아카아시는 거짓된 질투를 하는 것에 있어서 이상하게 적나라하게 굴곤 했는데, 쿠로오는 마지막 순간에서야 깨닫는 것이다.


"담당자가 또 찾아올지도 모르겠네요."
"널 찾아가면 뭐가 해결된다고."


붕대를 감은 손가락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자면 아카아시가 그 옆을 지킨다. 위로를 받는다거나 하는 형식적인 자리 메우기는 아니다. 쿠로오는 알고 있었다. 주먹을 쥔 손틈새를 파고들며 다정하게 맞잡는 상대의 손과, 낮은 편인 딱 그정도의 체온. 그리고 그 분위기. 모를 수가 없다, 그리고 그 사실은 상대 또한 알고있다. 힘을 주어 슬쩍 손가락을 구부리면 곧 힘이 풀려 맥을 못추리고 벌벌 떨렸다. 아, 이제야 안다. 진심이 아님으로 치부했던 그 질투가 진정으로 진실되었었음을. 진실의 크기가 절망보다 컸다. 쿠로오는 병원 침대 옆에 마련된 자리에서 며칠 째 신세를 지는 중인 아카아시에게 축객령을 내리지 않는다.

그때나 지금이나 가여운 쪽은 아카아시였다. 건반들을 밟고 올라간 왕좌는 그에게 사실 더이상 별 의미가 없었고, 제게 얽힌 왕좌의 싸움 또한 흥미가 없었다. 하지만 절박한 상대또한 흥미 없음, 의미 없음으로 일관하는 건 가엾다.





그는 가여운 소유욕을 가졌다.
당신을 질투합니다, 하지만 그 재능은 아니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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