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쿠로] Double to King

HQ

2016. 6. 11. 19:57

유난히 힘든 아침이었다.

어제, 내가 술을 마셨던가. 커튼을 쳤는데도 비쳐들어 오는 햇빛이 눈을 찔렀다. 아마 한창 중천인 햇빛에 눈이 부시다 못해 시렸다. 눈을 뜨는데 뻑뻑해서 뜨는 것 같지도 않아. 아마도 지독한 숙취에 시달리는 중이었다.



보쿠토와 마시는 술자리에서는 유난히 페이스를 오버해버리는 경우가 잦았다. 특유의 편한 분위기일 때도 그렇고, 연인간의 끈적한 분위기일 때도 그렇고. 어쩌다보면 주량을 뛰어넘는 알코올이 핏줄에 녹아들곤 했던 것이다. 어딘가 익숙하게 머리가 멍한 이 기분은 딱, 필름이 끊긴 다음날의 그것이었다. 또 뭐에 그리 삘이 받아서 그렇게 마셔댔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사실 쿠로오는 처음 보쿠토와 뒹굴고 살을 섞었던 다음 날부터 과거의 자신을 이해하려 드는 것을 자주 포기했다. 그땐 심지어 맨정신이었지. 가끔 '과거의 나'라는 존재가 미쳐돌아서 상식 밖의 행동을 해대는 것에 쿠로오는 반쯤 해탈한 상태였다. 보쿠토를 만나고 나서 더 그런 것 같다는 게 스스로의 소견이다.


침대 옆의 온기는 주인이 될 사람이 하나 뿐이었다. 달리 누구겠는가.


에이스 스파이커의 단단한 팔은 무겁기도 무겁다고 생각하며 쿠로오가 못지않게 무거운 눈꺼풀을 밀어올렸다. 완전히 끌어안겨 자고 있었네. 어쩐지 덥더라. 근육의 무게가 맞는 건지 정말로 무거워서 그 팔 안에서 뒤척이는 데에 끙, 하는 소리가 절로 났다. 쿠로오는 자연스럽게 구태여 그걸 치워내 움직이기 시작하기를 포기했다.

딱히 뻐근한 고개를 돌려 시계를 보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만 장렬히 늦잠을 잤다는 걸 모르진 않았다. 언뜻 보면 느즈막하고 여유로운 아침이지만, 여유로움을 빙자해 느리게 버벅이는 것이 곧 숙취라거나 숙취, 혹은 숙취같은 데에 시달릴 운명이라는 걸 온 피부로 느껴지도록 경고하는 중이었다.

새삼 느끼는데 식사량에 운동량까지 많아서 그런지─사실 체질이라는 데에 한표를 던지지만─ 팔에 닿아오는 가슴 근육이 장난이 아닌지라 혀를 내둘렀다. 여자 속옷이라도 입혀보고 싶은 비주얼인데. 시간이 느리게 가는 것처럼, 둥둥 뜨는 아침이다. 사고회로가 더디다는 걸 스스로도 알고 있었다. 딱히 뭔갈 생각하고 싶진 않다. 그러니까 이 새끼 가슴 생각이나 하고 있었겠지. 어쩌면 그래서, 아침 햇살을 받아 더 번뜩이는 듯한 황금빛 눈동자와 눈을 마주쳤을때 제 발이 저렸던 걸지도 몰랐다. 너무 빤히 쳐다본 게 이유였을까? 시선을 느꼈는지 잠에 취한 부엉이의 예상보다 이른 기상이었다. 벌건 대낮에 백지같은 머릿속으로 한 발칙한 상상의 내용에 쿠로오가 어디에서 오는 건지도 불분명한 어떤 죄책감을 느꼈다. 짐짓 뻔뻔하게 아니, 내가 뭘. 하면서도 쿠로오? 하고 웅얼이는 어눌한 발음에 어색하기 짝이 없는 아침인사가 멋대로 튀어나갔다.


"보쿠토."


좋은, 응? 순간 제 귀를 의심할 정도로 낮은 목소리에 쿠로오가 멍하게 눈을 끔뻑였다. 쿠로오, 하고 부르길래 따라서 보쿠토를 불렀을 뿐이다. 그 전까지 일어나서 한 마디도 안한 건 맞지만 아침이라 잠겼다고 타협을 보기엔 좀 심한 것 같아 쿠로오가 눈을 굴리며 큼, 큼 목을 가다듬었다. 까끌까끌한 게 완전히 나갔다. 술 마시고 노래라도 부른 건가.
멍 한 건 저쪽도 마찬가지인 듯 보쿠토는 둥그런 눈을 사정없이 끔뻑이는 중이었다. 저 표정 바보같으니까 하지말라고 했는데.


"오, 너 아침부터 장난아니게 섹시하다. 나 완전 뻑갔어."
"죽을래?"


보쿠토는 쿠로오의 찡그린 미간부터 콧잔등, 입술까지 입을 맞추기 시작했다. 아침부터 진하게 뽀뽀세례를 퍼붓는 게, 새한테 쪼이는 것도 아니고. 낯간지럽기 그지 없다. 뻑 가버렸다며 빤히 바라보는 눈빛이 너무 대놓고 사랑에 빠진 십대 소년인지라, 쿠로오는 그 말대로 '뻑간 표정'에게서 고개를 홱 돌렸다. 그리고,


악.


하나, 둘, 셋. 상황파악 끝.
쿠로오는 왜 오늘의 아침이 평소처럼 베개에 얼굴을 묻은 채 시작되지 못했는지를 이해했다. 그제서야 몸을 뒤틀자 아니나 다를까 엉덩이 사이가 질척하게 젖어 미지근한 무언가가 새어나오는 중. 어쩐지 이질적이던 아침은 과거의 자신이 그렇게 다짐했던 스스로의 맹세를 상큼하게 다 잊고 또 술김에 보쿠토와 잤다는 걸 이제야 드러내준다. 내가 또 술 퍼마시고 이 새끼랑 뒹굴면 개다, 불과 나흘 전 자신이 호언장담했던 말이 머릿속에서 메아리쳤다. 그들이 동거를 시작한 건 두달 쯤 전부터였는데, 아무리 사귀는 사이라 한들 틈만 나면 다른 하나 침대의 존재여부를 잊고 뒹굴기 일쑤인지라 쿠로오가 종종 하던 다짐이었다. 그제서야 보쿠토의 넋 나간 표정을 이해할 수가 있었다. 여느때 처럼 부질없었다는 뜻이다. 너, 하고나면 묘하게 색기 흐르는게. 언젠가 베개맡에서 힘들어 죽겠다는 쿠로오에게 대놓고 말했다가 결국 매를 벌었던 그의 발언이 이제서야 생각이 난다. 매 순간 사랑에 빠진 것 마냥 구는 보쿠토가 특히 바보처럼 굴 때부터 알았어야 했는데. 어찌나 격하게 붙어먹었는지 눈을 뜨고 몸을 움직여 근육의 격통을 몸소 체험하기 전까지는 전날 밤을 아예 기억하지도 못했다. 필름이 끊긴 후에야 뒹굴기 시작한 모양이다─이거 아주 개자식이네.

쿠로오가 신경질적으로 보쿠토를 옆으로 밀었다. 생각해보니 열이 받는 것이다. 이게, 술 취한 사람 벗겨서 할 짓 못할 짓 다 해놓고 뻔뻔하시네. 어쩌면 존재할 보쿠토 쪽도 필름이 끊겼었거나, 취한 자신이 먼저 옷을 벗었을 경우의 수들을 무시하는 데에 쿠로오는 도가 텄다. 침대 위에서 누가 올라가든 실세는 다른 거라고 할까. 쿠로오가 전날 밤을 기억하면서도 친절히 아침인사를 건넨 줄로만 아는 보쿠토만 어쩐지 입 안에 텁텁해진다.





유난히 힘들 수 밖에 없는 아침이었다.

쿠로오는 눅눅한 시트를 몸에 휘감았다. 트렁크 한 장을 간신히 걸치고 침대 아래에 꿇어앉은 보쿠토와는 상당히 대비되는 행색이다. 쿠로오는 늦은 아침의 침대 위 흰 시트의 서걱거림을 침해받은 것이 여간 못마땅한 것이 아닌 듯 했다. 입이 댓발 튀어나온 보쿠토는 나 지금 삐졌어요,를 굳이 숨기지 않는다. 조금 시무룩한 척이라도 하는 게 좋은데 말이야, 코타로 군. 침대에서는 반대일지 몰라도 대체로 그들의 관계에서 갑은 쿠로오였다. 영민한 고양이의 음, 그런 특성이랄까. 틈만 나면 파닥거리는 부엉이랑은 다르답니다. 그 결과로 보쿠토는 쿠로오가 정색을 하고 목소리를 낮게 깐 뒤 윽박지르면 찍 소리도 못하고 가리키는 대로 바닥에 무릎을 꿇고 벌을 섰다.


"하지만, 쿠로오 너도..."
"기억 안나."
"치사해!"


뭐? 안 그래도 홉뜨이면 눈매가 꽤나 무서운 쿠로오의 눈초리가 사나워졌다. 동공이 작은 편이라 꼭 눈이 풀린 것 같아서. 보쿠토는 그의 삼백안을 꽤나 좋아했지만 이런 경우는 조금 예외다. 아, 아닙니다. 방금 자다 깨서인지 완전히 부스스하게 흐트러진 머리칼이 축 늘어진다. 기 죽이는 데에 조금 성공한 듯 싶어 괜히 뿌듯해진 쿠로오는 일부러 제 인성상태를 의심하는 행동은 하지않는다.

허리가 욱신욱신 아팠다. 이거는, 진짜 아는 사람만 아는 건데. 그 '아는 사람'의 범주가 극히 일부인데도 불구하고 지극히 평범한 자신이 포함되었다는 사실이 딱히 자랑스럽지는 않지만 시무룩하게 텐션이 내려가서까지 쉴새없이 투덜대는 보쿠토의 입술은 조금, 사랑스럽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언제까지 해야해?"
"손도 들어."


아 물론, 그거랑 이거는 별개의 문제지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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