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라우시] 그 판타지 세계에서의 귀납법

HQ

2016. 5. 31. 17:25

판타지는 죽었다.

어떤 환상이 깨어나도 회색 도시는 결국 그저 그런 모노톤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판타지 소설에나 등장하던 드라큘라 백작이라던가, 뱀파이어, 흡혈귀 따위가 실존한지 이미 몇십년이 넘었지만 삶에 찌들어 퍽퍽한 도시는 단 요만큼도 꿈과 동화에 물 드는 법이 없었다.



01.

세상에 뱀파이어가 존재한다,─바로 윗세대만 해도 처음으로 드러난 전설 속의 존재에 우왕좌왕 어느 정도 그로테스크한 환상에 젖어 본 경험들이 있었지만 현대에서 그 논제는 그냥, '하늘에 구름이 있다' 정도의 사실이 되어 있을 뿐이었다. 열 명 중 하나가 뱀파이어다. 인구비율에서 심지어 꽤 높은 수치를 기록한 그들은 날카로운 이를 가진 인간과 별로 다를 게 없었다. 뱀파이어들은 한명의 동반자를 가지고, 그가 제 안정성을 보장하는 한 보통의 인간과 똑같은 삶을 살았다. 그들이 요구하는 흡혈의 수요는 생각보다 그리 크지 않았기에 며칠에 한번씩 피 칠갑을 하고 홍염의 살인극을 벌인다는 호러 영화의 클리셰들은 자연히 묻혔다. 실제로 인구의 10%가 긴 송곳니를 가졌지만 하루가 멀다하고 목에 구멍이 뚫린 시체가 실려나오는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그저 소설 속의 이야기일 뿐인 것이다,

─언제나 그렇지는 않지만.

언제나 말썽을 부리는 건 '극소수'다. 10%의 뱀파이어 중 반을 훨씬 넘는 수가 그들의 동반자와 함께 사회에 녹아들어있다. 안전을 보장하고, 보장받는다. 균등한 법의 울타리 안을 자처하는 그들에게 문제는 없었다. 그리고 말썽은 나머지, 약 3%가. 어디에나 따라붙는 '예외'의 부분이다. 등록되지 않은 뱀파이어는 전 세계적으로 존재했지만 그 중 반은 은둔을 한다. 세상 밖으로 나오기 싫어하는 종족 특성은 그들에게 닥치는대로 민간인을 잡아죽일 명분을 제공하지 않지만 세상은 더는 그들을 존중해주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 소수 중에서도 '극소수'가…





"이번에도 안되겠는데요?"

…참 좆같기 때문.

시라부 켄지로는 뱀파이어였다. 정성스레 휘저은 홍차와 우윳빛을 닮은 비스듬한 기장의 머리칼은 알 만한 사람들이 모두 이를 갈게 한다. 어디에나 무법을 사랑하는 돌연변이가 존재했고, 야생을 사랑하며 소설책이나 영화의 방식대로 하룻밤 새에 목덜미에 구멍이 뚫린 시체를 골목길에 던져두기를 즐기는 뱀파이어 또한 여전히 존재했다.

"먼길 오시느라,"

수고하셨습니다. 시라부는 목에 구멍만 뚫은 게 아닌지 바닥에 쓰러져 기괴하게 고개를 비튼 여자와, 막 도착한 헌터들에게 기꺼이 생긋, 맑은 미소를 보였다. 엿이나 먹으라고 해. 그대로 담을 넘어 휙 사라지는 시라부를 잡기에는 헌터─인간과 뱀파이어의 신체적 조건의 차이가 꽤 크다. 시라부 켄지로는 미등록 뱀파이어였고, 게 중에서도 악명이 높기로 유명했다. 보통은 얼굴을 가리려 쓰는 가면이나 후드 따위의 예의도 보이지 않으며 무자비하게 사상자를 낸다. 어쩌면 행위 그 자체보다는 후폭풍을 구경하는 것을 더 즐기는 듯 늘 아슬아슬하게 손아귀를 빠져나가는 것이다. 눈앞에서 그를 놓쳐본 숱한 헌터들은 언제나 깍듯한 존댓말로 다음을 기약하는 그의 태도에 짜증을 감추지 않았다.

엿이나 먹으라고 해.

미등록 뱀파이어들의 살육은 빈번하지는 않았으나 드물지도 않다. 종종 일어난다- 정도의 빈도에 뱀파이어 헌터라는 단체가 존재했고, 그들은 훈련을 받아 미등록 뱀파이어들의 무법을 규제하고 치안을 지킨다. 뭐, 거의 톰과 제리마냥 서로를 물어뜯고 도발하며 엎치락 뒤치락 세력 싸움을 이어 온 게 벌써 오십년을 훌쩍 넘겼다는 점을 감안하면 딱히 세력의 우위는 없다. 헌터들은 점점 더 조직적이고 체계적으로 뱀파이어들을 압박했고 그에 따른 실적도 나쁘지 않은 편이었지만 비율은 언제나 비슷비슷하게, 먹이사슬 마냥 잘 유지되어 왔던 것이다. 그 평행선상의 줄다리기에서 시라부는 단연 화려했다. 수배대상을 꼽으라 하면 세 손가락 안에 드는 그는 한번만 깊이 물어 피를 빨아내는 일반적 흡혈과 반대되는 독특한 흡혈방식─얕게 여러번, 살이 무르도록 잇자국을 낸다.─과, 고위 헌터의 면전에 뱉고는 사라졌던 명대사. '엿이나 먹으라고 해' 한 마디로 단번에 헌터들의 원한을 사들였다. 시라부 켄지로 한번 잡아서 가두면 편하게 눈을 감을 수 있겠다는 헌터가 깔린 만큼, 그는 오늘도 화려한 한탕을 치르고 난 후였다.


그는 오히려 단정하고 강직한 편이었다. 일주일에 두세번은 헌터들의 혈압의 맥스치를 찍어야 편안하게 눈을 감지만, 약올리기를 즐기며 온통 시끄럽게 휘젓고 다녀야 직성이 풀리는 요란한 성격은 결코 아니었다. 아, 그게 그건가. 결국 시라부가 돌아온 곳은 도심의 애매한 외곽 어딘가에 위치한 골목길이었다. 여섯달 쯤 전 물어뜯긴 시체, 물론 뱀파이어의 소행이 분명한 여자의 시체가 실려나온 이후 딱 알맞은 시간이 지나 인적도, 헌터들의 감시도 멎어가는 이 골목은 벽이 높고 길이 좁아 그가 종종 애용하는 곳이었다. 살육이 있고 반년 쯤 지나면 지레 겁을 먹은 인간들은 지나지 않아 어디에 아무렇게나 엎어져 있든 볼 사람이 없다. 인적이 끊겨버리면 자연히 감시에서도 멀어지는 게 당연하기에 시라부는 추적의 열기가 한풀 꺾일 때 까지 아무런 의심없이 벽에 기댄 채 길 바닥에 널브러졌다.

날이 조금 축축하고 어둑하다 싶더니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옷이 젖는 건 별 다른 문제가 되지 않는다. 쏟아지는 빗줄기가 밟고 온 길의 체취와 흔적을 지워줄테니까.





​02.

​​비가 오지 않아도 그 골목은 가로등이 거의 나가 푸른빛이 섞인 먹색이었다. 어두컴컴한 골목길은 여섯시 즈음 이른 저녁에도 해가 조금만 낮아지면 금세 그림자가 져 인적이 드물었는데, 딱히 구애받지 않을 신체조건인 우시지마 와카토시 정도나 겨우 멀쩡히 걸어다닐 만한 장소였던 것이다. 덕분에 하루 종일 비가 쏟아졌지만 좁고 어두운 골목을 구태여 찾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우시지마는 180이 훌쩍 넘는 장신이다. 어딜봐도 장정 한 둘으로는 어쩌지 못할 몸이기도 했지만 본인 자체도 별다른 자각이 없는 편인지 결국 그의 파란색 ​우산은 아무도 없는 골목 안으로 접어들었다. 어차피 매일 지나는 길이었고 비가 와서 젖은 땅이나 간신히 두어개 끊기지 않고 버티는 가로등이 빗줄기에 가려져 평소보다 배는 어두컴컴하다는 것 빼면 별 다른 게 없었다.

딱 세번째 모퉁이를 돌기 전까지의 이야기였지만.



소설의 뻔한 클리셰였다. 비오는 날, 골목길. 흔한 만큼 여기저기 가져다 대기 좋은 배경설정과, 쓰러져 있는 사람. 몇달 전에 여기서, 뱀파이어에 물린 여자가 하나 있었는데. 누가 여기서 미등록 뱀파이어가 세상 모르고 자고 있을 거라 예상하겠냐만은, 결과적으로 물에 빠진 생쥐꼴이라 꽤 안쓰러워 보였던 비주얼의 시라부 켄지로는 이 시점에서 난생 처음으로 '뱀파이어에게 물리면 어떡하려고'의 황당하고도 친절한 걱정을 받아 보았다. 흉흉한 세상과 그 한가운데의 (순전히 외양적) '약자'를 걱정할 약간의 친절함, 물먹은 남자 하나를 들쳐업을 힘 정도만 있다면 이야기는 시작할 수 있다. 이야기의 첫장에서, 우시지마 와카토시는 깔끔하게 바닥을 보이는 경각심으로 그 스타트를 끊었다.

그 골목에서 우시지마 와카토시는 시라부 켄지로를 주웠다.





03.

"여기 어딥니까?"

그렇게 피곤했나, 눈을 떴을 때 보인 광경이 익숙한 골목길의 차가운 시멘트 색 벽이 아니라 아이보리색 벽지와 흰색 몽글몽글한 타올이라는 걸 알아차렸을 때 시라부는 당황을 감추지 못했다. 눈을 감을 때 즈음 빗방울이 두엇 씩 떨어지고 있었음 정도는 알고 있었으나 예민한 청각에 걸리는 창밖의 빗소리는 한 두 방울 정도가 아니다. 아예 들이붓는 수준이라, 시라부는 자신이 구멍뚫린 듯 쏟아지는 비를 불사하고 겨우 손바닥 몇개만한 그늘 아래에 숨어 꽤 불쌍하게 웅크리고 있었을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어쩌면 퍽 가련해보여, 그 자리에 그냥 둘 수 없었던 모양이다. 인간의 동정심이라는 걸 새삼 경험하게 된 시라부가 그닥 다정해보이는 얼굴은 아닌 눈 앞의 남자를 다시 한번 찬찬히 뜯어본다. 그는 아무래도 민간인 같았으나 떡 벌어진 어깨며 드러나는 운동의 흔적, 근육이 경계를 놓지 못하게 했다. 그가 만약 뱀파이어 헌터였다면 시라부는 이미 목이 따이고도 남았겠지만─적어도 그들이 품은 원한의 크기 정도는 자각하고 있는 시라부였다.─무사한 것을 넘어 커다란 타올을 둘러주고 김이 나게 데운 우유를 내미는 것으로 보아 적은 아닌 것 같기는 했다.


"위험한 곳에 쓰러져 있길래, 실례했다면 사과하지."
"그 골목이 위험합니까?"


뱀파이어, 등록도 되지 않았다는 걸 알고서야 멀쩡한 제정신으로 자택까지 들이는 사람은 없다는 걸 알면서도 뱀파이어에게 뱀파이어가 위험하다는 사실을 상기시켜주는대화는 우습다. 전혀 그럴 것 같지 않아서 꽤 세심하게 구는 남자의 이름은 우시지마 와카토시라고 했다. 그는 시라부에게 6개월 전 사고가 있었던 골목에 얽힌 이야기를 들려준다. 무뚝뚝한 성격을 고스란히 반영해 말주변이나 센스라고는 담백하기 그지 없는 스토리텔링이었지만 시라부가 가끔 읊던 제 영웅담에 등장하던 그 이야기였다. 그 여자를 물어 죽인 거, 난데. 시라부는 우시지마의 입에서 이름도 없이 '뱀파이어'로 지칭되는 주인공 또한 그 당사자로서 꽤 우스웠던 것 같다. 저는 괜찮은데.

그가 건넨 데운 우유는 머그컵까지 뜨끈해 다 마실 때 즈음엔 얼음장같은 체온이 다 녹아있었다. 머그를 옆으로 내려 둔 시라부가 감사를 표하며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했다. 감사드립니다─왜냐면,

그건 뱀파이어의 육감이었다.
우시지마는 분명 백팔십을 훌쩍 넘겨 저를 훨씬 웃도는 장신이었지만 잡은 손을 당겨 그를 끌어오는 것은 뱀파이어의 악력 정도면 충분했다. 손끝에 만져지는 두꺼운 손은 단단하고 어림 잡기에도 굳은 살로 뒤덮여 있었다. 못지않게 단단한 목덜미에 얼굴을 묻고 흥분한 송곳니를 피부에 박아 넣을 때, 훅 풍기는 미치도록 단 향에 시라부는 제 감이 틀리지 않았음을 알았다.


─왜냐면, 제가 뱀파이어거든요.


그의 목덜미는 숱하게 물어 온 이십대 여자들처럼 연하거나 부드럽지 않았다. 오히려 완전히 반대의 단단함이다. 하지만 그 피부를 송곳니 끝으로 찢어 파고들면 머리가 멍해지고 코끝이 울리는 단내가 풍긴다. 간혹 뱀파이어에게 미친듯이 단 피를 제공하는 인간이 존재했다, 그것은 아주 희귀하고 거의 운명과도 비슷한 개념인지라 보통의 뱀파이어들이 모두 경험해본 맛이 아니다. 그리고 바로 이 순간은 시라부에게 그 만남의 시점이 되어주었다. 시라부는 제 육감이 가리키는 바를 따른다. 그새 계산은 다 끝났기에, 아직 서너번밖에 삼켜내지 못한 상처 위를 아쉽다는 듯 핥으면서도 마지막 한모금을 욕심껏 빨아낸다. 시라부는 배어나오는 미소를 눌러참으며 한껏 우울한 표정을 지었다. 우시지마, 그는 놀란 듯 굳은 채 말이 없었지만 비명을 지른다거나 하지는 않는다. 시라부는 천천히 겹쳤던 몸을 떼어내고, 웅얼거렸다.

"죄송합니다."

물려 죽을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굳어버린 그의 멍한 표정과 마주친 눈이, 어쩌면 황홀하다고 생각했다.





04.

죄송합니다.

그 한마디면 타협점은 훅 낮춰졌다. 며칠 전 다짜고짜 목을 물렸을 때부터, 우시지마는 시라부의 '죄송합니다'에 한없이 약했다. 우직함을 넘어 꽤나 둔감한 그와 종족을 타협하는 것은 그렇게 어렵지 않을 수 있었다. 결과적으로는 우시지마가 한껏 일그러진 울상으로 은인에게 못할 짓을 했다, 다시는 그러지 않겠으며 정말 죄송하다는 시라부에게 대 뱀파이어의 경계를 하지 않으며, 순순히 그를 남긴 채 집을 비우기도 한다. 상처를 내자마자 훅 풍기는 단 내음에 시라부는 머리끝까지 차갑게 잠기는 소유욕을 느꼈다, 아주 익숙하지 않은 느낌이었지만 어떻게 해야할지 알 수 있었다. 시라부는 꼬리 내린 강아지를 연기하며 진솔된 가식을 내뱉었다. 그는 이 피를 놓칠 수 없음에 확신한다.

결과적으로, 시라부의 육감은 틀리지 않았다.
무표정에 우수를 담는 것은 그렇게 어렵지 않다. 단지 입술을 꼭 닫고, 미간을 살풋 찡그리면 되는 것이다. 시라부는 가증스러움을 자처하는 것을 망설이지 않았다. 깨끗하게 바닥 난 경각심과 눈치로 미루어보아 우시지마에게는 언제나 날조된 우울함이 통하기 마련이었으니까. 시라부는 사냥에 가리는 것이 없었다. 방도를 가리지 않는 것이다. 그의 옷깃을 쥐고, 표정을 밉지 않게 구기는 것으로 그는 제게 경계를 낮추고 허용범위를 넓혀주었다.


"이런 부분까지, 의지하게 돼서. 정말 죄송하게 생각합니다."
"딱히, 괜찮다."


이종족과 인간은 이미 물리적인 힘에서 차이가 났고 미등록 뱀파이어는 그 차이를 쥐고 흔드는 마지막 이종족이었다. 신체적 조건의 이점을 이용하여 폭력적으로 군다는 것이 그들에 대한 민간인의 보편적 인식이라면, 실은 그 말이 거의 맞아들었지만 시라부는 필사적으로 그 반대를 어필했다. 인구의 3%, 혹은 그 이하로 산다는 것이 열악하며, 그 인식 때문에 더 힘에 부친다는 것까지. 제가 안전하다는 걸 보증해줄 사람은 없었습니다, 저는 항상 피를 마셔야 살아남았으니까요. 거의 소설이나 전설, 동화 수준의 거짓이었지만 시라부는 우시지마가 제 말을 믿을 것이라는 걸 안다.─그건 육감이다.

사흘이 지나면 슬슬 갈증이 올라온다. 어느 정도의 포식 이후에는 길게는 한달까지 버틸 수 있는 게 뱀파이어의 육체라지만 시라부의 기준은 그 간격이 짧았다. 채 며칠을 버티지 못하고 도지는 갈증은 그 원인이 다른 데에 있지 않다는 걸 그는 알고 있었다.─우시지마 와카토시의 피는 미치도록 달다. 송곳니의 끝이 그 목덜미에 상처를 낸 그 순간이 시라부에게 선악과를 베어문 이브가 되었다. 하나, 둘, 셋. 목울대가 움직여 그를 모두 삼켜버리기 전에 입술을 뗀 건 사실 본능에서 나온 기적이었다. 필사적인 절제와 순간적인 이성의 판단. 그게 없었다면 시라부는 이미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그를 꼭꼭 씹어 삼켜버렸을지도 모른다. 우시지마는 여전히 무딘 표정으로 고개를 살짝 비틀어 목선을 드러냈고, 시라부는 천천히 그 목덜미를 물었다. 얕게 여러번 잘근잘근 씹어 목을 거의 넝마로 만들어놓곤 하는 버릇대로 한번 박아넣은 이를 끝까지 밀어넣지 않고 살갗을 긁고 찢어놓으며 여러번 핥는다. 너무 아작을 내놓아서도 안되고, 너무 얌전하게 흔적 없이 다녀가서도 안된다. 아, 안되는데. 치미는 소유욕을 찍어 누를 자신이 없다. 점점 늘어나는 잇자국이 혀끝에 스치는 맛은 황홀하기 그지 없었다. 천천히 배어나는 핏방울을 핥아 목덜미를 적신다. 시라부는 이 사람에 한하여, 영원히 갈증이 마를 일은 없을 것이라 여겼다.


"사냥을 나가기가 무섭습니다, 제 뒤에는 언제나 헌터들이 있었으니까요."


그 말에 조금이라도 목을 축일 수 있다면, 으로 비롯하여 순순히 셔츠깃을 열어주는 우시지마는 시라부가 이미 사냥중에 돌입했다는 사실을 꽤 오랫동안 알 수 없을 것이다.





05.

우시지마가 집을 비우면 시라부의 표정에서는 거의 아양을 닮았던 온기가 싹 사그라들었다. 스스로가 퍽 가증스러워 대체로 웅크린 채였던 몸을 쭉 펴고 스트레칭을 한다. 주 2회, 꼬박꼬박 헌터들 앞에 얼굴을 들이밀고 한바탕 휘저어 주지 않으면 속이 간지럽던 혈기 충만의 뱀파이어는 언제 그랬냐는 듯 일주일 째 얌전히 꼬리를 만 채였다. 글쎄, 손에 들어온 건 빈틈없이 움켜쥐어야 하니까.

주인 아닌 뱀파이어 홀로 남겨진 빈집을 찾는 손님들은 타이밍이 좋았다. 원체 감이 좋으니 이미 대충 눈치 채고 있을 것이다. 베란다에 내려와 유리창을 두드리는 고시키 츠토무와 세미 에이타에게 시라부는 별 다른 설명치레 없이 잠금장치를 열어주었다. 꼬박 일주일 동안 소식이 없었던 것에 대한 왈가왈부는 없다, 미등록 뱀파이어가 연명하기 꽤나 퍽퍽한 사회에서 함께하는 관계인 그들의 유대는 생각보다 견고하기 마련이었다. 세미는 시라부를 가장 오래 알아 온 뱀파이어였고 누구보다 그를 잘 아는 축이었다.

그리고 그 '시라부를 가장 잘 아는 뱀파이어'의 입장에서,
시라부 켄지로는 약았다.


"헌터들이 너 죽은 줄 알고 꽤 좋아하던데."
"계속 좋아하면 되겠네요."
"이미 글렀으니까 왔지. 곧 방문하실 것 같으니까 얼른 떠라."


시라부 정도라면 수사망에서 분명 거물이었다. 딱 일주일 전까지만 해도 잠적한 수배대상을 찾기 위해 일주일 정도는 아낌없이 쏟아부었을 헌터들의 맹목적임을 즐기던 그가 이번에는 혀를 내두르며 고개를 저었다. 아, 정말…

끈질기다니까.


"감사합니다, 들어가보세요."


시라부는 근래에 꽤 그럴듯해진 친절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알아서 할 수 있으니까. 어쩌면 꽤 괜찮은 해결책이 있는 것도 같아서, 그는 오랜만에 검은 코트를 입고 무리나 지어다니는 머리빈 족속들─순전히 주관적인 '헌터'의 정의이다─에게 엿을 먹일 계획을 세웠다. 세미 에이타는 많이 부드러워진 그의 그 미소를 본 적은 없지만 알 것 같았다, 시라부 켄지로는 약았다.





06.

세미 에이타와 고시키 츠토무가 비등록 뱀파이어로서 한가닥 하는만큼, 그들이 던져준 정보는 정확했다.

검은색 코트를 걸치는 것은 단순히 눈에 띄지 않도록 사복이라도 검은 것을 유니폼 삼는 그들의 특징이었다. 시라부는 괜스레 무거워보이는 그 검은색이 아무튼 예쁘장하지 않다는 의견이었지만, 오랜만에 마주한 코트 무리의 팔락대는 코트자락은 꽤 반가웠다.─이렇게 생각하고 있다는 걸 상대편이 알면 꽤 이를 갈겠지만.


시라부 켄지로.


도망자와 추적자는 재회한다. 기다렸다는 듯 총구를 겨누는 그들에게 시라부는 여느때처럼 흔적도 없이 휙 사라지는 편을 택하지 않았다.

이럴때까지 매사에 무디기만 한 우시지마는 사랑스러웠다. 평생을 옭아맬 셈이었고, 고작 이런 걸로 겁에 질려버린다면 그거대로 또 사랑스럽겠지만 동시에 곤란할테니까. 냉소하며 표정에 날을 세운 시라부의 앞에 우시지마의 등이 있었다. 그 뒤에서 입꼬리를 비틀어 올리는 것은 언제나와 같은 도발의 방식이 아니었지만 꽤 마음에 든다. 어깨를 으쓱하며 보이는 날카로운 표정은 오직 그의 뒤에 있기 때문에 내비칠 수 있는 칼날의 면모였다. 소란스럽게, 하면, 곤란합니다. 그의 앞이잖아요. 입모양으로 한 단어 한 단어를 뱉자 금방이라도 덮칠 기세인 헌터들을 마치 병아리라도 된다는 양 바라보며 시라부는 소리없이 웃었다.


"우시지마 씨, 죄송합니다."
"그는 안전하다."


입은 웃고 있지만 눈은 웃지 않으며, 눈은 웃지 않지만 목소리는 울기 직전이다. 시라부는 제 집착과 소유에 대한 의지가 우시지마의 동정심과 등가교환된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에 그에게 우울한 목소리로 날조된 과거의 모든 것을 실토하곤 했는데, 침묵이 하는 거짓말. 한가지 말해주지 않은 것이 있지만 꿈에서도 알지 못할 우시지마는 헌터들에게 말했다.


"내가 보증하지. 뱀파이어의 등록이 그리 어렵지 않은 것으로 알고 있다만."


이 순간 무너지는 헌터들의 표정보다 시라부를 기쁘게 하는 것은 아귀가 맞아 들어가는 족쇄의 금속음이다. 헌터들은 학수고대하던 원수의 징벌이 영원의 시간 뒤로 사라져버린 것에 대한 분노를 감추지 않았다. 이종족, 뱀파이어 등록에 관한 법령 제 1원칙, 2조. 민간인에 의해 안전이 보증된 뱀파이어는 특수한 경우를 제외하고 뱀파이어 헌터에 의해 처벌받지 않음. 대화상대에게 뜨거운 우유를 내어주기를 좋아하는 우시지마와 식은 우유를 사이에 두고 했던 대화의 내용과 거의 일치한다.

내가 보증해주겠다. 그거면 되나?

그 날, 과거의 시라부는 뜨겁게 달았다가 식어버린 우유 특유의 비린내에 질려 머그잔에 손을 대지 않았다. 이유는 간단하고도 정직하게, 그것보다 훨씬 더 단 것을 마실 수 있으니까.

네, 그거면 됩니다.

몇십년을 이어 온 시라부의 무법행진에 종지부가 찍히는 순간이었다. 헌터들은 더이상 이름 모를 골목과 신분증마저 피에 범벅이 된 시체에서 그의 흔적을 찾고 분노할 일이 없다는 사실과, 가히 철천지원수라고 부를 뱀파이어를 제 손으로 쳐넣지 못함에서 치미는 화 사이에서 깊은 갈등 중이었지만 그것은 그의 관심 밖에서도 한참이었다. 시라부 켄지로는 사냥에 성공했고, 조연은 헌터들이었으며, 그저 그 것에 심심히 감사하며 충족감에 젖는다.


감사합니다,
정말로.





FIN.

시라부 켄지로는 사냥에 성공했다.

이종족, 뱀파이어 등록에 관한 법령 제 7원칙, 1조. 뱀파이어의 안전을 보증한 인간은 그의 영생을 상대 뱀파이어에게 귀속당한다.

'HQ' 카테고리의 다른 글

제목없음  (0) 2016.06.09
[리에쿠로] 새끼사자 수인 리에프 썰  (0) 2016.06.01
[시로쿠로] 일인칭  (0) 2016.05.29
[오이이와] 개화  (0) 2016.05.27
[리에쿠로] 이율배반적 로맨스  (0) 2016.05.25
myosk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