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로쿠로] 일인칭

HQ

2016. 5. 29. 03:23

​* 시로오 테츠로 X 쿠로오 테츠로. 호모의 끝 자공자수...





꿈에서 나를 보았다.



1.
배구부 연습이 고된 것을 불평한 적은 잦았지만 한번도 그것이 진심인 적은 없었다. 하지만 몸이 지치는 건 어쩔 수 없었기에 오늘의 쿠로오는 한숨이 잦았다. 이상하게 피곤한 날이었던지라 씻어야한다는 생각을 결국 이긴 것은 잠이었다. 쿠로오는 간신히 양말을 벗어 던지고는 그의 평소 버릇대로 베개에 얼굴을 묻었다. 꿈에서 나를 보았다. 둥둥 뜨는 듯한 공간은 이게 현실일 수 없음을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꿈인 것을 자각하는 꿈 속에서 나는 흰 머리칼과 검은 눈을 가지고 있었고, 사진을 찍기 싫어하는 켄마를 겨우 꼬드겨 바라 본 카메라에 찍혀나온 사진과 꼭 닮은 유들유들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어떻게 서 있는 거야? 나를 보았을 때, 내 질문은 다른 게 아니었다. 누구냐고 물어본다면 그건 '나'이기 때문이었다. 일인칭에 잠식해 죽어버릴 것 같았다. 나는 대답했다, 너도 지금 서 있잖아. 그는 '너' 와 '나'를 구분짓고 있었다. 그 미소가 거울이나 사진, 쇼윈도와 닮았다. 기분 나쁜 꿈이었다.




2.
다음날, 같은 꿈을 꿨다. 밤만 되면 이상하게 잠이 쏟아졌다. 하품은 나오지 않고, 딱히 눈꺼풀이 무거운 것도 아닌데 머릿속이 둔했다. 한참을 멍하게 샤프펜슬 끝을 종이에 대고 가만히 정적 속에서 숨을 쉬었다. 이대로는 안되겠다 싶어서 침대에 누운 게 오 분도 되지 않았지만,


나는 지금 꿈 속이었다.
오늘도 내가 있었다.


어젯밤에도 본 하얀 내가 나오는 꿈을 또 꿀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던 사실이었다. 그 꿈은 어쩐지 기분이 나빠서, 함께 등교하면서도 켄마에게 꿈에 대한 얘기를 하지 않았다. 교실에 도착해 가벼운 인사를 나누면서야 꿈에 대한 생각을 잊을 수 있었고, 실은 그 후로는 완전히 잊고 있었다─오늘도 이를 드러내며 웃는 하얀 머리카락의 나를.

"안녕, 무슨 생각해? 나랑 말 안할 거야?"
"쿠로오 씨는 웃을 때 그렇게 기분 나쁘지 않은데, 만약 그렇다면 좀 절망적이겠다고 생각중이었답니다."

뼈 있는 말이네. 하얀 나는 입꼬리를 조금 더 올려 웃으며 한발짝을 다가왔다. 꿈 속이니까, 에서 비롯된 이 검은 공간에서 걷는 법을 나는 몰랐고, 그래서 뒷걸음질 치지 못했다. 거리가 가까워졌고 그건 당연하게도 유쾌하지 않았다. 왜 그렇게 기분 나빠하냐고 물었지만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나는 나였고, 당연히 대답을 알고 있을 것이다.
─꿈에서 깨고 싶다고 생각했다.
일어났을 땐 새벽 네시 오십분이었다. 애매한 시각에 짜증을 부리다가도 다시 푹신한 베개에 고개를 묻는 순간 다시 잠을 잘 수 있었다. 다시 잠 들었을 때 '나'는 없었고, 그 날 쿠로오 테츠로는 지각을 했다.





3.
또 다른 나는 저를 '시로오 테츠로'라고 불러주기를 원했다. 검을 흑 자를 쓰는 '쿠로'를 단순히 반전시킨 하얀 이름이다. 딱히 호감이 가는 이름은 아니었지만 나는 그러겠다고 했다. 꼭 널 불러야 해? 대답은 그냥 답게도 개구진 웃음이었다.
─오늘도 꿈에서 깨고 싶다고 생각했고, 오늘도 네시 오십분에 잠에서 깼다.

꿈은 깨고 싶다고 생각하면 언제든 그를 현실로 끌어올려 주었지만 보통은 꿈보다 진하게 남은 허상의 잔상에 허덕이는 경우가 더 많았다. 시로오, 테츠로. 꿈의 배경은 지독히도 검었으며, 하얀색의 나는 백설만큼 희었다. 얼마나 길게 머물든 결국 현실을 떠났던 조각배가 닻을 내리는 건 네시 오십분이라는 애매함의 한가운데였고, 시로오 테츠로라는 이름을 되새기는 것으로 남은 새벽을 지새운 쿠로오 테츠로는 결국 다시 잠에 들지 못했다. 피곤함이 덕지덕지 붙은 얼굴로 운동화를 끌며 켄마를 만나 학교에 간다. 쿠로, 잠 못 잤어? 이미 게임기에 시선을 고정해버린 후였지만 그 짧은 새에 언뜻 보고 피곤을 읽어낸 소꿉친구는 분명 눈치가 빠르다. 별 건 아니고, 잠을 좀 설쳤더니. 특이한 잠버릇만큼 잠만은 누구보다 푹, 잘 자는 편인 쿠로오가 잠을 설쳤다는 표현과 딱히 어울리지 않다는 걸 잘 아는 켄마였지만 그는 별다른 말이 없었다. 먼저 물어놓고 침묵으로 답하는 켄마의 시선은 여전히 게임기 화면에 박힌 듯 고정되어 있었고, 쿠로오는 그저 자연히 느려지는 발걸음에 보폭을 맞췄다.



별 건 아니고.





4.
거울 밖에서 웃는 스스로의 얼굴을 보는 건 생각만큼 재미가 없었다. 오히려 '내가 웃지 않을 때 웃고 있는 나'라는 건 사뭇 기괴하게 느껴진다. 흰색 머리칼은 바람에 흩날리는 눈발처럼 가볍고, 부드러우며, 희고… 쿠로오는 바람 한 점 불지 않는 검은색 공간에서 방방 뜨는 흰색 실타래가 마치 먼지같다고 생각하면서도 그 현실성 없는 아름다움에 넋을 놓았다. 완전히 새하얗다는 표현은 여기에나 맞을까, 빛을 모두 삼켜버린 순수한 흰색이 눈이 부시지 않아서 쿠로오는 그 머리칼을 싫어했다.

요즈음에는 잠을 설쳤냐, 피곤해 보인다 등의 말을 듣는 일이 잦았다. 하지만 쿠로오는 꿈의 내용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누군가 듣는다면 꽤 흥미로워 할 이야기임은 분명했으나 쿠로오는 그 꿈이 유쾌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나'…, 그러니까 시로오의 웃음은 일상생활을 자꾸 비집었고 쿠로오는 그걸 좋아하지 않았다. 불쑥 불쑥 나타나는 얼굴은 스스로를 가장 닮았으며 동시에 가장 닮지 않아서, 그 이질감과 괴리감에 몸서리를 쳤다. 꿈 속의 검은 공간, 맹점 속의 꿈. 삼일 째 이어져 온 같은 등장인물의 희극은 관객에게 환영받지 못하는 듯 했고, 그 증거로 쿠로오 테츠로는 귀가길에 커피 두 캔을 샀다.


밀려오는 잠이 무서워서.


이상하게 피곤하던 요 며칠, 머리만 대도 죽은 듯이 잠에 빠진 게 혹여나 꿈 때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든다. 멍한 머리는 밤을 새며 하려던 일을 뭐였더라, 하고 잊게 만든다. 두시 쯤 되니 그제서야 눈꺼풀이 무겁고 하품이 나왔다. 깜빡 졸려던 순간 문득 뇌리를 스친 그 보슬보슬한 흰색의 잔상에 그마저도 날아가 버렸지만. 쿠로오는 제출기한이 삼일 정도 남은 과제를 끄적이며 날밤을 샐 수 있었다. 종이의 흰 여백을, 자꾸 자꾸 흑연으로 덮어 가렸다. 검은 밤에 위안을 받는다. 어쩌면 그렇게 도망치고 싶었던 대상이 걷히고 날이 밝을 때 쯤 그 어슴푸레한 푸른빛 새벽하늘이, 어딘가 마음에 들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날이 밝는다는 것과, 까만 밤의 종결이. 어쩌면 정말로 반갑지가 않았다.



수학에는 도저히 흥미가 있을래야 있을 수가 없다. 특히 그게 점심식사 바로 다음 시간에 이어질 때는 절대로. 쿠로오는 연필 끝에 시선을 고정하고 유려하게 늘어 선 글자와 숫자들의 까만 꼬리들을 잡아늘렸다. 몇번 째인지 모를 하품이 식사 후의 나른함에 섞여 늘어졌다. 눈치를 보자 하니 이미 엎어져 반쯤 코를 고는 중인 것들이 태반이라, 쿠로오는 마음 놓고 한번 더, 입이 찢어져라 하품을 하며 턱을 괸다. 아, 진짜 졸리네. 열아홉 남고생─그것도 배구부─의 체력은 삼일 밤 정도는 거뜬히 샐 수 있지만 이상하게 몸이 무거운 건 가뿐히 올라앉은 흰색 실타래, 아니. 수학 수업 때문일 것이다. 지루해도 너무 지루해서 대체 잠을 깰 수가 없다며 쿠로오가 짜증스레 잔뜩 뻗친 머리칼을 스스로 헝클었다. 그러지 않아도 잔뜩 엉망이던 검은 머리가 삐죽삐죽 선다. 쿠로오는 턱을 괴고 멍하게 앞자리 남자애의 옷깃에 묻은 작은 얼룩을 바라보았다. 현실로부터 아득해지는… 졸음이었다.



"내가 무서워?"



힉, 꼴사납게도 화들짝 놀라며 잠에서 깨자 방금까지 쥐고 있던 샤프펜슬이 요란하게 교실바닥을 뒹굴었다. 목깃 뒤쪽에 얼룩이나 묻히고 다니는 앞자리 애가 등을 돌리고 이쪽을 보며 키득키득 웃어댄다. 아, 순간 멍하게 움직이지 못하던 쿠로오는 그제서야 꾸물꾸물 샤프펜슬을 주웠다. 손이 조금 떨리고 있었다, 꿈에서 또 나를 봤어.





5.
시로오 테츠로는 그 후로도 꼬박꼬박 하루의 가장 어두운 시간을 비집었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했다. 짧게는 한두마디, 길게는 몇분─그래봤자 겨우 감에 의존한 체감 시간이었을 뿐이지만─동안 서로를 마주했다. 어쩐지 익숙해져가는 새하얀 나는 여전히 기분이 나빴지만,

말그대로 어쩐지 익숙해져가고 있었다. 그리고 그는 더이상 깨고 싶다는 생각을 하는 날 놓아주지 않는다.





6.
스트레스.

쿠로오 테츠로는 요즘 부쩍 눈 밑이 어둡거나 멍하게 시간을 때우는 일이 잦고, 그러지 않아도 짧은 손톱을 물어뜯는다. 말 수가 줄고 부원들이 질색하곤 하는 유치한 장난도 치지 않는다─쿠로오 테츠로는 삼학년이었다. 차기 주장은 결국 켄마가 맡았다. 무척 귀찮아 하는 것을 드디어 설득해 냈을 때는 기쁜 듯 웃었지만 그건 곧 제 심장을 빼 내어 내놓는 것과 다름이 없어서, 뒤를 돌았을 때 밀물처럼 밀려드는 공허함을 견뎌낼 재간이 없었다. 든든하고, 언제나 뒤를 지키는. 주장의 자리에서 가장 견고한 버팀목이었던 쿠로오는 그 자리에서 내려온 순간을 버틸 수 없었다. 극심한 우울이었는지도 몰랐고, 스트레스인지도 몰랐다. 매일같이 찾아오는 시로오 테츠로의 하얀 머리칼과 빨려드는 듯한 미소에 노이로제에 걸려버린 것이 아니라면 쿠로오 테츠로는 그 가라앉는 듯한 착각에 진저리 쳤고, 명백하게 그가 싫었다.

쿠로오는 더이상 시로오를 '나'라고 부르지 않았다.
스스로를 두려워하는 기분에 더이상 질리고 싶지 않아서.



너 밖에 없어. 네가 아니면 누가, 로 시작해서. -주장 맡아주라, 로 끝나는 수많은 청원의 말들을 늘어놓는다. 게임기의 액정을 가리면서까지 쏟아지는 부탁과 설득에 지쳤는지 결국 켄마는 으, 하는 단말마의 불평과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거의 한달을 쫓아다녀 끈질기게 귀찮게 한 결과였지만 뒤를 도는 순간 공허가 덮쳤다. 그 날은, 텅 빈 집에 도착해 익숙한 공기를 들이키고 그 내음에 안정하는 순간 울음이 났다. 삼학년의 끝이었다. 고교 생활과, 부활동은 이제 없었으며… 쿠로오는 타산적이면 그러하였지 결코 감상적이지는 않았지만 가끔은 넘치는 감정에 잠겨 울곤 했는데, 오늘이 그 날인 듯 그는 울었다. 스포츠백을 겨우 던져놓고 벽에 기대 끅끅대며 울었고, 머리가 아플때까지 이를 악물고 소리를 죽였다. 우울함 속에서 헤엄칠 때 잠겨 죽기 직전에는 늘 '내가 보였다'.

익사의 순간
그가 한 생각은,

오늘은 꿈을 꾸지 않게 해주세요.

담청색이었다. 검은 공간이 아닌 꿈 속은 오랜만이라 조금 감상적인 기분이 되었다. 나는 어느 정도 꿈 속에서 움직일 수 있게 되었다. 적응의 동물이라고, 뇌리에 박히는 플래시라이트 같은 순백에 대한 본능적인 거부감 또한 많이 사그라든 게 스스로도 느껴졌다. 유쾌하진 않다, 오늘은 정말로 네가 보기 싫었는데. 그의 머리칼은 처음으로 다른 색이라는 게 섞여 오늘은 조금 푸른 빛이 돌았다.


"오늘도 안녕."
"내일도 안녕 할 거야?"


당연하지. 눈을 접어 웃는 게 이질적인 건 이 정도 예쁘장한 미소를 나는 짓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나와 같은 얼굴을 두고 예쁘다고 말하는 게 아주 조금은 웃긴 일일지도 모르지만, 시로오는 늘 묘하게 홀리는 듯한 느낌이곤 했다. 흰 손끝 같은 것. 그건 사람을 아주 울적하게 만들었고, 분명 세걸음 정도 뒷걸음질 치는 방법을 알고 있었으나 나는 그가 성큼 헤엄쳐─아무튼 그건 유영하는 것 같은 움직임이었다─나를 끌어안을 때까지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시로오는 흰 손끝만큼 찬 손을 가지고 있었다. 괜찮아. 울려퍼지는 듯한 속삭임마저 깊게 가라앉는 냉기를 품은 듯 몽환적이었는데, 그 날의 나는 많이 울적했는지 그만 거기에 기대 울어버렸다.





7.
무뎌진 걸까, 나는. 그날의 내가 너에게 물었다. 그는 내 뺨을 잡고 그렇게 말했다,

"원래 하나가 아니었어."





8.
입을 맞추려는 순간 잠에서 깼었다. 소름돋게 차갑지만 가장 따뜻했던 포옹을 한 그 날 이후부터 그는 종종 내 손을 잡고, 머리를 쓰다듬고, 뺨을 감싸쥐었다. 꿈 속인데도 선명히 느껴지는 낮은 체온이 거듭할 수록 차갑지 않게 되었다. 어쩌면 취한다거나, 홀리는 걸지도 몰라. 경계는 서서히 허물어지고 새카만 허무가 점점 푸르게 흐려진다. 하늘빛이 되어버린 공간은 어쩌면 여기가 물 속이 아닐까, 하는 착각에 나를 몰아넣었다. 어쨌든 중요한 건, 더는 꿈을 꾸는 게 뭐라고 할까…

… 싫지 않았다.



부쩍 지각을 하는 일이 잦아졌다. 대입이 끝나고 완전한 학기말에 접어든 이후인지라 크게 꾸중을 듣지는 않았지만 해이해 졌다는 이야길 들었고, 필연이었지만 배구부를 그만 둔 것에 대한 위로 또한 들었다. 꿈의 체감 길이는 들쑥날쑥 했지만 보통은 새벽 네시 오십분이나 모닝콜이 울리는 일곱시에 현실은 나를 깨우곤 했는데, 요즈음에는 그러지를 못한다는 게 아마 지각의 사유가 될 수 있다. 배경이 옅어질 수록 꿈은 점점 무거워지고 잠을 잘 놓아주지 않는다. 나는 거의 한시간을 더 푸르지만 하얗기만 한 그의 머리칼과 목덜미에 얼굴을 묻고 꿈결 속에서 꿈을 꾸었다. 나는 그의 낮은 체온에서 안정과 온기를 느끼고 있었기에 누구보다 그를 온전히, 꽉 끌어안는다. 그러면 그는 늘 내게 입을 맞추려 다가오다가 아홉시, 혹은 열시 즈음 눈이 떠졌다.

문득 그 입술이 결국 내게 닿지 않는 이유가 궁금해진다.





9.
시간이 너무 빠르네. 책상에 놓인 액자 속에는 검은 학사모를 쓰고 꽃다발을 한 아름 품은 채 웃는 쿠로오가 있었고, 그 옆 침대에는 베개를 끌어안고 비몽사몽 간으로 눈을 끔뻑이는 쿠로오가 있다. 오후 네시 오십분이었다. 이제야 일어난 거야? 부스스하게 무거운 머리를 짚는 그의 옆에는 작은 약병이 굴러다녔다. 쿠로오는 더이상 베개사이에 얼굴을 끼운채 완전히 파묻혀 자는 버릇대로 자지 않는다. 그는 여전히 멍한지 머리칼을 긁적이며 겨우 침대를 내려왔다. 늦은 끼니라도 챙겨야 할테니까, 하면서도 쉽게 자리를 떠나지 못한다. 손끝이 저렸다, 요즘 자주 이러네. 해질녘의 햇빛은 눈이 부시게 아름답지만 붉고 노란 빛은 쿠로오에게 그닥 감동을 주지 못한다.

쿠로오는 하얀색을 사랑했다. 눈이 부시게 빛이나는 백설이나, 플라스틱적인 티타늄 화이트보다 아예 모든 빛을 가두어 버려 거의 무(無)에 가까운 흰색을 사랑했다. 자각 이후 모든 꿈 속에서 환몽의 끝에는 입맞춤이 있었다. 길게 입을 맞추고, 미지근한 입술을 나누고 나면 알 수 없는 시각─주로 이른 저녁이나 늦은 점심 즈음에─ 깨어나 버리곤 했다.



Q. 졸업하고도 꾸준히 연락이 닿을 것 같은 사람은?
A. 당연히 쿠로오 선배죠! 왠지 쭉 연락할 것 같고... 하실 거죠? 네?



스마트폰의 최근 기록은 거의 파란 화살표로 채워져있었다. 수신 통화, 수신 통화, 수신 메시지. 아, 그리고 빨간 물음표. 부재중 전화 네 통. 으음, 왜 전화 했었냐는 문자가 귀찮아 쿠로오는 화면을 껐다. 저녁식사도, 내일 있는 강의들과 교양수업도. 이상하게 연락이 안닿는 쿠로오 대신 성가신 건 켄마였고 결국 계속되는 대리연락에도 아무런 조치가 없자 삐져버렸는지 켄마에게서의 연락마저도 끊겨버렸다. 쿠로오는 흰 쌀밥이 가득 찬 밥솥의 뚜껑을 열어둔 것도 잊고 식탁에 앉아 재떨이를 끌어왔다. 희게 피어나는 담배연기는 그를 닮았다. 시로오, 시로오.



음,
시로오는
이렇게
잿빛이 아니야.


쿠로오는 곧장 방으로 들어가 침대 옆에 구르던 약병을 집어들었다. 과다복용하면 호흡하기가 상당히 힘들고요, 혈액 순환이 잘 안될 수 있습니다. 아시겠죠? 정량 넘기시면 안되고...





10.
오늘도 꿈을 꾸면 그가 있을 것이다.





꿈에서 그를 보았다.

myosk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