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켄쿠로] 타살시도

HQ

2016. 7. 18. 00:08

​* 켄쿠로 전력 60분 : 상처, 흉터





습관에 무뎌지는 것도 습관이다.



손가락을 얽으며 두 손을 맞잡으면 그의 손은 언제나처럼 저보다 조금 작고, 미지근보다 조금 차가웠다. 켄마는 입이 짧아서, 어릴 때부터 혼자라면 남겼을 마지막 한 두입을 쿠로오가 해치우면 그거야 말로 딱 타산적인 계산이 되곤 했다. 워낙에 바깥 공기 쐬는 것을 귀찮아하는 탓도 컸고. 그 덕에 마른 팔에 배구부 웜업이 꽤 헐렁하게 남는다. 그러면 보이는 것은 흰 편인 피부와 도드라진 손목 뼈, 그 아래의─



"쿠로."


켄마는 손은 작아도 손가락이 길었다. 손마디도 제법 단단한 데다가 체격만으로 판단한 것보다 아귀 힘도 꽤 되는 편이라, 손끝으로 손끝을 더듬다가도 그가 낮게 제 이름을 부르며 손을 꽉 쥐어 멈추면 쿠로오는 저도 모르게 숨결을 죽여 내뱉어야 했다.





쿠로오의 첫 몽정 상대는 우습게도 코즈메 켄마였다. 쿠로오는 여전히 동년배들과 낄낄 거리는 대화 중 '악몽'이 화두에 오를 때마다 자연히 떠오르는 그 날의 켄마를 씻어내지 못했다. 중학교 이학년 여름이었는데, 하얀 이불 위에 앉아있던 검은 단발에 마른 등이 어째서 그렇게 자극적인 광경이었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철없는 중학생은, 그게 여자가 아닌 제 소꿉친구임을 한 눈에 알아봤는데도.

켄마는 몸집이 작았다. 배구를 하자며 끌어당겼던 손은 그때부터 조그마했는데, 쿠로오는 그 손끝에서부터 어설프게 궤적을 그리는 토스만큼이나 그 손을 좋아했다. 어쩌면 그래서였다.

꿈 속의 켄마는 쿠로오의 목을 졸랐다. 하얀 몸은 헐벗었고 구김 없는 시트보다 희었으며 어린 나이에 닥치는 대로 접했던 싸구려 포르노 중 어떤 것보다 적나라했던 것 같다. 모순과 욕망이 뒤엉킨 어떤 환상은 독했다. 그날 밤 혼자 속옷을 빨았던 다음에도, 그 다음에도. 몇번이고 그 묘려하게 올라가던 입꼬리를 잊지 못할 정도로. 쿠로오는 때때로 그 손가락이 제 목덜미에 휘감기는 착각에 빠졌다. 그럴 때면 정말이지 그 손아귀 안에서 영원을 다 할 수 있을 것 같았고, 피지배 하에 놓이는 것 같았다. 쿠로오는 옅은 모멸감과 희열이 마구 요동치는 관계선상 한 가운데에 서 있었다.

결국 배운 것은 무뎌지는 법과, '피지배'. 그 것.





수없이 잡았던 손은 낯설고도 익숙한 감촉이었다. 우리는 언제나 모순적이었으니까. 제 손가락을 모아 쥔 켄마의 손등을 빤히 보았다. 유난히 창백한 피부 아래로 파랗게 핏줄이 비쳐보인다. 오늘의 너는 조금 더 낯설다.


"괜찮아?"
"별로, 이제 괜찮으니까…."
"이 전까지 말이야."
"쿠로, 바보같은 거 물어보지 마."
"코즈메."


얽혀든 손가락은 한쪽이 일방적으로 풀기 보단 상호가 힘을 풀어야했다. 쿠로오는 그 손을 힘을 주어 들어올리기 보다, 제 고개를 숙이는 편을 택했다. 손등 뼈에 바싹 말라 까칠한 입술을 가져다댄다. 미안해. 작은 사과야말로 모순의 대가로써 가장 당연한 것이었다.

켄마는 또 아니, 별로. 몇 개가 채 되지 않는 단어로 말끝을 흐렸다.

몇분은 진득하게 잡고 있던 손을 놓는다. 쿠로오 테츠로와, 코즈메 켄마가. 켄마는 당연하다는 듯 게임기의 전원을 켰다. 이제는 쿠로오에게 마저 익숙한 게임 시작음이 혼자만 통통 튀었다. 켄마의 집은 쿠로오의 한 블록 앞이었다. 켄마가 도어락을 풀고 문고리를 잡으며 곧바로 게임기 화면에 다시 시선을 고정하는 것까지 지켜보고 나서야 쿠로오는 걸음을 옮겼다. 주머니에 손을 넣어 핸드폰을 꺼낸다. 한참을 꺼 두어 차갑게 식은 것의 전원을 꾹 눌러 화면을 켜면 밀린 몇개의 알림이 쏟아져들어왔다. 한블록을 느리지도, 빠르지도 않게 걸었다. 알림창에 뜬 수많은 연락 중 대부분을 차지한 이름을 꾹 누르고 답장을 보낸다.

─헤어지는 게 좋겠어, 정말 미안해.

메시지 발신이 성공적으로 완료되었습니다. 고개를 들자 어느새 집 앞이었다.





그래도 아침은 조금 선선하더니 요즘은 이른 시각에도 볕이 따가웠다. 추위에도, 더위에도 무딘 편 답게 켄마는 이 날씨에도 웜업을 걸친 채였다.


"안 더워?"
"별로…."


소매가 흘러내려 틈새로 보이는 손목에는 붕대가 감겨있었다. 꼬박 사흘을 입원했다가 나온 거라 피는 배어나오지 않은 게 다행이었다. 등교길은 늘 그렇듯 사람이 붐볐다. 쿠로오는 손목시계를 힐끗 곁눈질하더니 켄마를 옆길로 잡아끌었다.

그늘 안은 폐부로 들어오는 공기가 조금 싸늘했다. 쿠로오가 빨간색 네코마 배구부 져지를 걷어올리더니 붕대 끝을 잡아 풀었다. 켄마는 일시정지 표시가 찍힌 게임 화면이 아무래도 가장 마음에 들지 않는 눈치였다. 오른손으로라도 하고싶은데, 그랬다간 게임 오버일걸. 다 안다는 듯 가만히 있으라며 붕대를 풀어나가는 쿠로오에게 켄마가 불만스레 한숨을 내쉰다. 삐죽 나온 입술로.​


"풀어지면 어떡해."
"안풀려."
"왜 그러냐고 물어보면,"
"연습하다가 삐었다고 할 거야."
"그 핑계를 대도 연습은 안 빼줘."
"…."


칫. 대놓고 불만이 가득한 켄마를 쿠로오는 잘 안다. 분명 손목이 삐었다며 하루, 이틀 쯤 빠지려고 들었겠지. 쿠로오가 붕대를 풀어내곤 손바닥을 잡아 조금 더 끌어당겼다.

습관적인 상처의 반복은 흉터로 남는다.
수많은 비틀림의 잔재는 지워질 여지도 없이 그 자리에 존재했다.

새빨간 줄이 직직 그어진 팔목은 또 야위어보였다. 켄마는 자주 그런 식이었다. 굶주렸고, 앙상하도록 여윈. 쿠로오는 그런 켄마의 곁을 떠나지 못하는 게 모순점의 핵심이다. 이번에도 한 치의 망설임 없이 얇은 피부를 찢고 혈관을 깊이 베었을 날붙이의 흔적이 깊게 남아있었다. 얇은 빨간 선들은 방금까지 숨을 쉬던 빨간 피들을 쏟아낸 흔적이었고, 그 뒤에 말라붙은 흉터들은 억지로 벌어졌던 살을 도로 붙인 흔적이었다. 코즈메 켄마는 이번에도 손목을 그었다.

켄마가 조금 힘을 주어 쿠로오의 소매깃을 꽉 쥐었다. 저도 모르게 숨을 죽이고 입매를 꾹 다무는 것은 습관이다. 피지배의 습관은 쿠로오는 제 몽정과 악몽의 간극을 자각하는 순간부터 길이 들어있었다. 켄마는 굳이 목소리를 크게 내지 않는다.


"쿠로."
"…."
"다음에는 진짜… 죽어버릴지도."


코즈메 켄마는 이번에도 손목을 그었다. 쿠로오에게 여자친구가 생긴 다음 날부터 지금까지 몇번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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