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에쿠로] 음주선상에 의한 연애 급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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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 4. 30. 18:48

​부제 : 배구부 주장과 사고를 쳤을 때의 대처 방법.

깨질듯한 두통만이 숙취의 전부는 아니었지만 오늘은 정도가 심했다. 찌뿌둥한 몸을 쭉 필 엄두조차 못내고 쿠로오는 부스스하게 눈꺼풀을 밀어올렸다. 아침이면 으레 그렇듯 으응, 하는 반쯤 잠에 취한 웅얼거림이 사정없이 갈라져 나왔다. 어제 무리해서 달리긴 했지, 어찌나 퍼마셨는지 진탕 취해 필름이 끊기듯 기억이 드문드문하다. 술 쳐먹고 뭘 하고 돌아다닌 거야, 나. 온몸에 들러붙은 근육통이 처참하다. 감기는 눈꺼풀에 내려앉은 햇빛이 눈이 부셔 쿠로오가 억지로 잠을 쫓았다.

헛숨을 들이킨 건 불쾌한 아침의 무거운 몸에 잔뜩 매달린 것의 정체를 알아차림에 의한 것이었다. 숙취만은 아니었다. 쿠로오는 생긴대로 노는 편이었고, 음주에 관해 예외가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정리하자면, 잘 마신다.

아마 충분한 준비운동과 정리운동 등의 공헌이 있었겠지만, 강도 높기가 이루 말할 수 없이 지옥같던 혹독한 연습에도 잘뭉치지 않던 근육이 뭘 하고 다녔는지 비명을 질러대는 게 어째 딱 싸한 기분이었던 것이다. 아, 윽... 절로 신음이 튀어나오는 말도 못할 삐걱임에 무언가 잘못 되었음을 직감한다. 불안감의 정점을 찍은 건 한쪽으로 푹 꺼진 매트리스보다는 그 위에 드러누워 세상모르고 자고 있는,

... 리에프?

사랑스러운 후배님의 영 연관성 없는 등장은 혼란스러웠으나 그 마저도 뻐근한 허리 통증에 삼켜졌다. 왜 이래, 의 '왜'까지만 생각이 닿았을 뿐인데 곧 모든 게 일사천리로 이해가 되는 것이다. 아니, 설마.

내가 미쳤다고, 내가... 내가? 혼란에 빠진 쿠로오의 현실 부정은 소리 없는 아우성보다 절박했다. 야, 씨발 내가?

"엑, 쿠로상..."

"나, 나 씨발. 너 나랑 잤냐?"

"...예?"

잠에서 덜 깨 늘 차분하던 머리가 이쪽 못지않게 까치집인 리에프가 눈을 꿈뻑꿈뻑 대는 것이 평소보다 답답해 멱살이라도 쥐고 흔들 참이었다. 굳이 그럴 필요 없게 만들어주는 건 후다닥 맞춰지는 기억의 조각에 헉, 하고 숨을 내뱉으며 창백해지는 리에프의 안색. 맞나 봐. 쿠로오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푹 숙이고 머리를 싸맸다. 허리가 빌어먹게도 존나게 아팠다.

그러니까 상황을 정리하자면, 나 얘랑 잤다. 술김에, 후배─그것도 신체 건장한 194cm 남자─ 와 잤고, 심지어 자신이 뒤를 댔고, 어떻게 해댄 건진 몰라도 허리는 작살이 났으며, 부재중이나 메시지함 상태를 보아하니 단 둘이 연락두절인 것을 부원들이 모르지 않는 것 같다.

─ 완벽히 최악이다. 부정할 수 없을만큼.

이건 명백히 현실을 부정해도 이상할 게 없는 최악의 케이스다. 사고회로가 정지한 듯 생각을 버벅이는 와중에도 좆됐음을 증명하는 증거들은 착착 정리가 되어 나오고 있다는 게 사람을 정말이지 심란하게 한다. 하이바 리에프는 그것마저 안되는 건지 얼이 빠진 채 제 쇄골께나 쳐다보고 앉아 있었다. 뭘 봐. 얼어붙은 듯 움직일 생각을 않는 시선을 따라 고개를 숙이자 붉고 푸르게 화려한 색채와 고른 잇자국이 파티를 벌이고 있는 중인 벗은 상체가 나온다. 와, 장난아니야. 질색을 하며 쇄골부터 가슴께에 집중된 빨간 자국을 누르자 아릿하게 저렸다. 섹스어필 아니거든? 방금 일어나 상황도 모르면서 일단 침부터 삼키는 철없는 후배새끼에게 눈 돌려라, 음산하게 내뱉으면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후다닥 시선을 떼어내지만 제가 보기에도 장난이 아닌 울혈 자국들이 시선을 강탈하기 딱 좋을 만큼 난장판이다. 얼마나 물어뜯어 놓은 거야, 미친놈이.

목은 한창 앓는 목감기 중의 그것처럼 쩍쩍 갈라지고, 근육이 뻐근하여 움직이는 데에 절로 악 소리가 나오는 걸 보면 답이 나오지만 쿠로오는 괜히 치미는 짜증에 리에프에게 눈을 흘겼다.

원래도 온화한 표정이나 다정한 얼굴과는 거리가 멀다 못해 연관이 없는 쿠로오였지만 타의에 의한 피곤이 덕지덕지 묻은 얼굴로 매섭게 노려보는 그의 박력은 장난이 아니었다. 리에프는 평소 그런 쿠로오의 청소년답지 않음을 꽤 좋아했고, 밤마다 그 얼굴 표정을 무너뜨리는 상상을 하며 욕정했으며 티슈를 적셨다는 사실을 부정하지 않지만 이건 또 경우가 다른 것이다. 러시아 어를 한마디도 못하는 건 맞지만 혼혈은 혼혈인지라 보드카를 물처럼 마신다는 게 먼 나라 이야기 만은 아닌 리에프에게 어제의 음주는 딱히 도를 넘었다는 느낌이 아니었는데. 눈을 떠보니 제 앞에 귀여운 여학생이 수줍게 남겼다는 느낌보다는 거의 물어뜯겼다고 표현해야 무방할 키스마크를 덕지덕지 붙인 채 퀭한 눈빛을 한 배구부 주장이 시트를 쥔 채 간신히 일어나 앉아있을때, 그 기분이란.

실은 기억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니었다. 간밤에 점점 쉬어가는 목소리로 곧 끊어질 듯 리에프, 리에프를 부르던 주장의 모습은 그 배덕함과 연관없이 지독히도 취향이었고, 제 발칙한 매일 밤의 상상과 꼭 들어맞았다. 화끈거리는 통증과 함께 긁혀나가는 등짝이나 견디지 못하고 울음을 터뜨리며 허리에 감은 다리를 꽉 죄어오는 것, 달래려 입을 맞추면 굶주렸다는 듯 허겁지겁 제 입술을 아주 물어뜯던 상대의 뾰족한 송곳니까지. 매끄럽게 이어지진 못해도 다 기억이 나는 것이다.

드러난 쿠로오의 어깨에 선명하게 박힌 빨간 자국이 제 것이라는 데에 리에프는 시기가 부적절한 정복욕의 충족을 느꼈다. 말했다간 그가 정말 자신을 죽이려 들지도 모르겠지만,

솔직히, 어젯밤의 선배는 진짜 죽여줬어여.

기억을 되짚어보자. 쿠로오나 리에프나 양쪽 모두 깨질 것 같은 숙취로 인한 두통에 시달리는 중이었다. 그 와중에 리에프가 건져냈다는 기억이 꼴깍대며 헐떡이면서도 쾌감에 허리를 휘던 쿠로오라면, 쿠로오가 건져낸 기억은 조금 더 시간상의 앞부분이었다. 그러니까, 술김에 제정신이 아닌 후배를 스스로 침대로 끌어들이던 자신의 모습.

쿠로오 테츠로는 현재 자신이 기억해낸 것에 현실을 부정하고 있었지만, 명백한 사실임이 증명되는 것은 이쪽에서 풀어냈음이 분명한 리에프의 교복 넥타이가 제 쪽에서 뒹굴고 있었다는 것. 리에프 스스로 풀어내 던져버린 와이셔츠 따위는 침대 아래에서 뒹구는데, 넥타이만 제 머리맡에서 단잠을 자고 있었으며, 어떤 손동작으로 그걸 끌러냈는지가 선명하게 기억에 남아있는 이상 부정할 방법이 없다. 이 멍청이가 지금 기억이 나는지는 모르겠지만, 분명 덮친 건 리에프 쪽이라도 리드한 건 자신이었다. 애초에 남자에게 뒤를 댄 다는 것이 그저 이론상의 이야기였던 자신이 왜 그랬는지는 삼천번 정도 죽었다 깨어나도 이해하지 못하겠지만, 입꼬리만 올려 웃어도 순진한─과연─ 일학년 후배에게 충분히 영향력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농염하게 섹스어필을 해댔던 것이 사실이다. 맙소사, 죽을까? 원래도 창백하던 안색이 거기까지 생각이 닿자 더 핏기가 쭉 빠진다. 마지막으로 목격한 탁상시계가 새벽 네시쯤을 가리켰던 것마저 기억하는 쿠로오는 밤새 그 짓을 해댔으니 눈밑이 퀭한 것도 이상할 게 없다는 걸 알았지만 여유를 잃으면 앞뒤도 못가리는 단세포인 리에프는 그게 아닌지라 괜히 찔려서 더 눈치를 보는 것이다.

덮친 건 그쪽이지만 리드한 건 이쪽이다. 미치겠네, 곧 쪽팔림에 고개도 못 들 제 모습이 훤해 쿠로오가 평소만큼 뻗치지도 않은 머리카락을 신경질적으로 쓸어넘겼다. 착잡하지 않다면 거짓말이지, 무려 부활동 후배에게 뒤를 댔는데. 완전히 얼이 빠져 멍하지만 의외로 이성은 차분했다. 그래, 일단 씻자.

몸을 살짝 움직이자 허벅지 사이로 주륵 흐르는 액체가 딱 지난밤 뒤엉키던 두사람의 체온만큼 미지근했다. 이거, 이거 분명 정액...

... 콘돔도 안꼈냐?

온얼굴에 짜증을 담아 흉흉하게 노려보는 쿠로오가 눈빛 하나고 꼭 누굴 잡아먹고도 남을 것 같아 리에프가 말끝을 흐린다. 그게... 선배가 그냥 넣, 으라고. 덩치도 더 크면서 위축된 채 정사에 얼룩지고 구겨진 시트에 시선을 쳐박았던 리에프가 힐끔, 쿠로오의 눈치를 살피더니 바로 입을 닥쳤다. 눈치라는 걸 제대로 갖추려면 아홉번 쯤 다시 태어나야 할 리에프가 생명의 위협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는 본능을 기적적으로 발휘했다 해도 과언이 아닐만큼, 쿠로오는 리에프가 거기서 한마디만 더했으면 바닥에 뒹구는 술병으로 기꺼이 그의 머리를 내리쳤을 것이다.

"너 그 입 닥쳐."

매섭게 쏘아붙이는 쿠로오는 월경 중의 여자애처럼 예민하기 짝이 없었다. 어쩌면 좀 비슷한 기분일 수도 있...

거기까지. 기분 나쁘니까 눈알 굴리면서 상상도 하지말라며 쿠로오가 왈칵 성을 낸다. 선배, 눈치마저 빠르면 너무 섹시한데. 지난밤 버둥대는 몸을 잡아누르는 손등과 팔뚝을 쥐어뜯고 할퀴었던 탓에 상처가 덕지덕지 달라붙은 손으로 리에프가 얼굴을 가렸다. 안 볼게여, 하는 제스쳐에 쿠로오가 느릿느릿 몸을 일으킨다. 지금 드는 생각은 딱 하나.

진짜 작살을 내 놨구나.

하이바 리에프는 네코마 고교 배구부에서 최악의 리시브 실력을 가졌으며, 아마 전 우주도 구제 못할 바닥을 기는 눈치의 소유자였다. 여러모로 참 부족한 이 자식이 보유한 가장 엿같은 스펙은 '혼혈'이라는 것이다. 바닥에 두 발을 딛고 서자마자 요령도 뭣도 없는 주제에 무식하게 아랫배를 들쑤시던 그 감각이 되살아난다. 그러고 보면 아무리 알코올을 들이부었다 해도 저런 걸 아래에 넣겠다고 덤빈 제 정신상태가 정상이 아닌 것이다. 대체 왜 그런거야? 하고 물어도 과거의 내가 대답할 리 없다는 걸 아는 쿠로오가 허리를 부여잡고 화장실로 걸음을 직직 끌었다. 걸을 때 마다 줄줄 흐르는 정액이 그 뒷모습의 허벅지를 희게 물들였다. 눈을 가린 손가락을 빠끔히 열고 그 모습을 바라보는 건 온전치 못할 쿠로오의 멘탈이 벌써부터 걱정되는 리에프였다. 딱히 사심을 들이부었다는 데에 부정은 않지만, 그 등이며 허리에 남은 온갖 멍과 울혈자국이 만족스럽지 않다고는 또 할 수 없다.

느릿느릿 욕실을 향하는 쿠로오의 발걸음을 따라 그가 중얼거렸음이 분명한 욕설과 투덜거림이 길게 남았다. 마구잡이로 뻗친 까만 머리카락이 자취를 감춘 후에야 리에프는 눈치를 보느라 억눌렀던 탄성을 터뜨렸다. 진짜 죽인다, 장난 아니야.

길게 뻗은 다리나 섹시하게 짜여진 등 근육 따위에 반해서 졸졸 따라다닐 여자애들은 깔렸어도 욕정하는 것은 자신밖에 없다는 걸 알면서, 리에프는 고등학교 입학 이래 제 AV 폴더에 금발이나 외국 여자를 취급하지 않았다. 흑발. 지나치게 올곧은 취향에 영향을 미친 건 결국 매번 상상하는 그 얼굴이었다. 연습경기에서 티셔츠 하날 걸치고 블로킹을 뛰는 그의 옷가지가 펄럭일 때. 남 몰래 군침을 삼키던 사자새끼에게 드디어 먹이는 던져진 것이다.

배구를 하다보면 손톱은 늘 둥글고 정갈하게 정리하는 것이 원칙이었다. 그럼에도 그 짧은 손톱으로 절박하게 제 등을 할퀴어대던 쿠로오의 울음소리가 여과없이 기억에 박혔다. 리에프는 언뜻 거울에 비치는 제 등과 어깨의 손톱자국이 흉터로 남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아, 너무. 너무 예뻐여, 진짜로.

가운데가 움푹 눌린 쿠로오의 베개를 끌어안고, 리에프는 제가 쿠로오의 가시방석에 앉은 줄도 모르고 행복에 젖었다.

"뭐 도와줄 것 있어여?"

"문 열면 죽여버린다."

물론 원래도 섹시하지만, 허스키하게 가라앉은 목소리까지. 치기에서 우러나온 실수라도 이 정도면 우주를 잠식하고도 남을 달콤함이 아닌가. 하이바 리에프는 사실, 이 상황이 꽤 마음에 들어하고 있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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